全斗煥(전두환)전대통령은 지난 16일 열린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재판부는 전씨에 대한 감형과 관련, 판결문을 통해 『전씨가 87년 6.29선언을 통해 국민의 뜻에 순종하고 평화적 정권교체의 단서를 연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6.29선언」은 87년6월29일 盧泰愚(노태우)씨가 「나의 구상」이라며 발표했던 대통령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한 시국수습방안. 그런데도 재판부는 『전씨가 「6.29선언」을 통해 국민의 뜻에 순종했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새롭게 판단한 「6.29선언」의 진실은 무엇인가. 본사가 단독입수한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의 회고록은 「6.29선언」의 탄생비화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씨는 전씨가 퇴임한 88년부터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해 왔다. 이 중 6.29선언 비화를 기록한 「제4장 청와대 하산기」 부분을 소개한다.〈편집자〉
6.29를 추억해야 하는 시간의 모퉁이에 기대앉아 6.29는 과연 그분 통치 7년반 세월중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추해본다.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해도 6.29선언은 그분 통치의 꽃이다.
6.29는 그분에게 있어 권력으로부터의 하산작업의 절정이다. 자신이 서있던 권력정상에 후계자를 남겨두고 권력의 휘장밖으로 단숨에 퇴장했던, 정치드라마의 백미(白眉)이다.
난 6.29에 대한 추억을 1987년4월무렵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그날 그분은 개헌논의를 중단한다는 가슴아픈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그분 임기가 꼭 열달 남았을 때 난 바로 그 열달이 지금까지 지내온 6년의 시간보다 더 힘든 기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살같지만 그분은 그 열달동안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었고 경험하려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알려지지 않은 평화적 정권 교체의 길을 가야만 했다.
「10개월동안 준비」 무엇이든 처음이 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흉내내거나 빌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달이라는 똑같은 시간앞에서 그분과 내가 시간을 보는 심정은 달랐다. 아직 열달이나 남아 있는데도 내 마음은 벌써 화살처럼 끝나는 날을 향해 날았다.
그러나 그분 처지는 달랐다.
후임자를 선정해야 하는 전임자 최고의 어려운 통과의례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계자 문제외에도 세가지 일이 그분의 헌신적 노고를 여전히 요구하고 있었다. 성공적 올림픽을 위한 준비, 흑자가 시작된 세계무역시장에 계속적인 활기를 불어 넣는 일, 권력이양기에 초래될 해이감을 견제하는 일들이었다.
처음으로 시작된 흑자경제 소식은 그야말로 낭보였다.
그동안 흑자를 위한 엄청난 노고가 있었음을 나는 안다. 그러나 모든 노고가 다 좋은 결실로 보답되지는 않는다. 수천가지 변수가 잠복해 있는 세계무역시장은 더욱 그렇다.
권력이양도, 정치적 진보의 꿈도 건강한 경제라는 후견인이 필요한 드라마였다. 숨이 차도록 추구해온 세가지 과제, 민주주의 선진경제 통일도 돈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것이 바로 경제의 힘이 가지는 고유한 마력아닌가. 무역흑자의 시작은 그런 의미에서 그분에겐 가슴을 때리는 낭보였다.
또하나의 행운이 있었다. 임기를 열달 남겨둔 그시간, 그분의 심중에는 이미 후계자에 대한 요지부동의 초상이 간직되고 있었다. 권력의 속성상 후계자 문제는 냉혹하고 비정하게 다루어지게 마련 아닌가.
평화적 정권교체는 제5공화국이 닻을 올리면서 함께 내놓은 출발음이다. 그 첫마디, 그 첫 공약이 제5공화국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다.
말하자면 그분은 임기 첫날부터 임기 마지막날을 준비하고 살아야했던 셈이다. 그분 스스로 선택한 제5공화국의 사명이고 족쇄이고 운명이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분은 예상보다 일찍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곁에서 보고 있으면 권력이란 진실로 번개같은 영광이다.
그분 심중에서 동지 노태우가 후계자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그 구체적 시간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들은 사람의 순수한 영혼과 정열이 세파에 물들지 않았던 청년기에 만났다. 우정은 수십년간 계속된다. 운명적인 몇몇 사건들이 그들의 관계를 친구에서 동지로 승화시켰다.
「항상「같은 운명」」 내가 친구 노태우를 동지 노태우라고 쓰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수십년간 그들은 언제나 같은 세계, 같은 웅지, 같은 시간속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운명의 물결에 휩쓸렸을 때 같은 배를 타고 표류했고 함께 권력심장부에 착륙했다. 이것이 그들의 40년 우정의 여로였다.
친구이며 동지인 노태우를 서슴없이 심중의 후계자로 선택했을 때 그분은 알고나 있었을까. 우리 정치사에 또하나의 우연한 운명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이 되기직전 나라의 공복으로 그분이 했던 마지막 일은 박대통령시해사건의 수사책임이었다. 사건종결후 남겨진 것은 권력앞에선 웬일인지 우정도 신의도 눈이 먼다는 옛경구의 확인이었다.
박대통령과 가해자 김재규는 동향에 동기생이었다.
박대통령이 동향이며 동기생인 김재규에게 쏟은 우의와 신뢰는 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관계가 만들어낸 것은 배신과 죽음이었다.
그분은 그 사건의 수사 담당자였고 그 사건을 통해 박대통령의 후임자가 되는 운명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제 박대통령이 동향이며 동기생인 김재규에게 가장 큰 신뢰와 중책을 맡겼듯이, 그분도 동향이며 동기생인 노태우에게 최고의 중책을 맡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 의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동향이나 동기생에겐 절대권력을 넘겨주어선 안된다고 말했다.
박대통령과 김재규가 만들어낸 비정한 선례는 외국정치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상습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바위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권력 앞에서는 우정도 의리도 변질되고야 만다는 권력의 속성, 권력의 운명을 그분은 믿지않았다. 권력계승에 대한 그 비정한 정설은 통속적인 우정이 만들어낸 통속적인 실패로 간주했다.
두사람의 우정은 통속적이 아니라고 그분은 굳게 믿고 있었다. 적어도 그분은 40년간 자신과 노태우 사이에 깃들인 우정은 통속적인 것과는 다른 뜨겁고 순수하고 고유하고 가치있고 멋진 그 무엇이라고 자신했던 것 같다.
자신과 타인사이에 흐르는 우정에 대해 이정도의 믿음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논평의 여지가 없다. 권력앞에서는 우정도 의리도 무력해져버린다는 정설을 그분은 바로 그 우정의 자부심으로 무력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후계자 노태우에 대한 수많은 견제와 모략이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이성적으로, 때로는 참 저돌적인 모습으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한 견제와 모략이 단 한번도 그분 내부에 간직된 친구 노태우에 대한 신뢰의 초상을 흔들리게 한적이 없었다.
한번 사람을 믿으면 끝까지 믿는 것이 그분의 성품이긴 했지만 노태우에 대한 그분의 신뢰는 너무나 각별해서 지금도 그 두사람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되고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