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英勳기자」 5공정권 말기인 87년 6월10일 저녁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 바깥 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모임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全斗煥(전두환)대통령 내외와 盧泰愚(노태우)민정당대표 내외, 그리고 민정당 당원들과 각계 권력주변 인사들이 모여 이날 노씨를 민정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한 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호텔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상찮은 시위사태 때문이었다.
같은 시간, 서울을 비롯한 전국 18개도시에서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朴鍾哲(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 규탄 국민대회」가 열려 전국의 도심은 온통 최루탄가스로 뒤덮였다. 훗날 「6.10항쟁」으로 불리는 국민들의 민주화요구시위였다.
이날 하룻동안 전국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연행된 사람만도 3천8백31명에 달했다.
하루전인 9일 연세대생 李韓烈(이한열·6월27일 사망)군이 교내시위 도중 머리에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아 쓰러져 군중은 더욱 흥분해 있었다.
이에 앞서 87년1월14일 발생한 박군 고문치사사건이 경찰간부들에 의해 「축소모의」됐고 「은폐」됐음이 그해 5월말 동아일보에 의해 폭로됨으로써 5공정권의 도덕성은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대학가 개학직후인 3월3일 개최된 「박군 49재 및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행사를 시작으로 촉발된 가두시위가 이를 계기로 폭동직전으로 치달아 결국 「6.10항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정치권에서도 양김씨 주도로 창당된 통일민주당이 4월13일 발기인대회에서 직선제개헌을 당론으로 정해 비폭력투쟁을 결의했다.
이에 전씨는 4월13일 「개헌논의 유보」 등을 골자로 한 특별담화를 발표, 타오르는 가두시위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4.13호헌조치가 있기 전까지 민정당은 당론으로 정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천명해 왔다.
이후 정국은 호헌을 내세우는 정부 여당과 직선제로의 개헌을 촉구하는 재야 및 야권간의 첨예한 대결구도로 치닫는다.
金壽煥(김수환)추기경마저 4.13호헌조치를 비판하고 나섰으며 이후 정의구현사제단 등 젊은 신부들의 단식기도가 이어졌다.
「6.10항쟁」의 특징은 연일 계속된 가두시위에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회사원 등 「넥타이 부대」가 대거 참가한 점이다. 민심은 이미 떠나 있었고 5공정권은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전씨의 부인 李順子(이순자)씨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무조건 살아서 평화롭게 청와대를 나가 옛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로 당시의 절박했던 심경을 털어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