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생활을 모두 경험하면서 같은 민족이지만 양쪽 사이에는 너무나 높은 장벽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상대에 대한 호칭과 정서의 격차다. 남과 북은 분단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잣대로만 상대를 재온 것같다.
즉 남쪽은 북쪽을 「북조선동무」로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북한씨」로만 대하려 한다. 북쪽도 「남한씨」가 아닌 「남조선동무」로만 생각하려 한다. 그러니 서로간에 마음의 대화가 통할 리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정서속에 상대를 경계하고 비하하며 타도해야 한다는 「칼」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형제간에는 70년대초 「7.4남북공동성명」과 같은 「요란한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겉만 번지르르 했을뿐 알맹이는 없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없다」는 선조들의 명언만 확인시킨 경우였다.
이는 양쪽의 태도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쪽에서는 「북한」을 「뿔달린 늑대」로 여겼고 「때려부수자 공산당」이라는 구호가 유행했다. 북쪽도 「남조선」을 「쪽바가지를 쓴 개」로 비하하며 「타도하자 괴뢰도당」을 외쳐대던 때였다.
90년대 들어 북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것은 체제붕괴로 이어지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남은 북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다. 남북대화를 열심히 주창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자신감을 상실한 북은 대남접촉을 가급적 피하는 대신 대미(對美) 대일(對日)관계개선으로 어려운 상황의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남은 이를 순순히 놔주려 하지 않았고 북은 「막가는 태도」로 대응했다. 「서울불바다」를 운운하며 「전쟁이 일어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느냐는 문제만 남았다」고 위협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양쪽의 태도는 처음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는 듯 했다. 남쪽은 북쪽을 「북조선동무」로 듣기좋게 부르며 배고픔에 허덕이는 그들에게 15만t의 쌀을 무상제공했다. 경수로사업에도 적극 나섰고 남북경협 활성화를 약속하기도 했다. 북쪽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존심마저 접고 「남한씨」하고 손을 내미는 듯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근본적 태도변화가 뒷받침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북쪽은 쌀을 받으면서도 「인공기게양」을 강요했고 「사진촬영」을 트집잡았다. 잠수함사건도 일으켰다. 남쪽은 이에 발끈, 대북지원을 중단했다. 다시 「북한씨」와 「남조선동무」라는 서글픈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애들 싸움도 이보다 더 할까」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공동설명회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서로를 이해해주는 형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일까.
장영철<<필자약력△30세 △동독 프라이베르크대 유학중 89년 귀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