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복고(復古)주의는 있게 마련이다. 세상 살아가기 힘들면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지난1일 본보 창간 77주년기념 국민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직무를 가장 잘 수행한 대통령」은 朴正熙(박정희)75.9% 全斗煥(전두환)6.6% 金泳三(김영삼)3.7% 순으로 나타난 것이다. 얼마전 어느 설문조사에서도 복제희망 인물로 김구 테레사 박정희, 복제기피 인물로는 김영삼 히틀러 김일성의 순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 文民에 대한 배신감 ▼
김대통령은 박정희집권시절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던 야당투사였다. 그 결과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또 문민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임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바로 그 「독재자 박정희」에게 국민적 평가의 윗자리를 내어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75.9% 대 3.7%라는 엄청난 격차다.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이처럼 차갑게 돌아서게 만든 것일까.
분노의 핵심은 배신감인 것같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다. 국가경영의 기본인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연속적으로 터져나오는 부정부패와 악취, 거기에다 아들의 국정농단까지 겹쳐 마침내 국가적 위기를 몰고 온 데 대한 반발과 거부감이 이런 국민적 반응으로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
박정희통치 18년은 빛과 그림자가 한없이 엇갈린다. 때문에 사람들은 애증(愛憎)에 따라 공(功)을 앞세우기도, 과(過)를 내세워 매도하기도 한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시대, 가난을 벗고 고도성장의 기틀을 잡았던 연대로 그 시절을 떠올린다. 경제와 안보면으로 보면 그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큰 일을 해낸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한편 18년이란 긴 세월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압살(壓殺)당했던 한 시절로 기록된다. 특히 유신(維新)이후 긴급조치시절이 그러했다. 합법적인 민주정권을 밀어내고 강압과 정보정치로 반대세력을 억압했던 시대, 국력의 극대화라는 이름아래 인권과 자유가 희생을 강요당했던 연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자체를 제도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국민의 선택권은 더이상 국민의 것이 아니었다.
숨막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자고 한다면 찬성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향수(鄕愁)들인가. 난국타개의 초인적 모델로 박대통령을 그리는 10권짜리 소설이 나오는가 하면 구미(龜尾) 그의 생가는 요즘 추모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나라가 어지럽고 리더십이 흔들릴 때면 힘이 지배하던 시절을 동경하게도 되지만 그러나 민심의 이런 흐름은 매우 위험하다. 어느 경우에도 권위주의는 청산할 대상이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가서도 안된다.
군사쿠데타 헌정유린 공작정치 지역갈등유발 같은 박대통령의 어두운 이미지는 뒷 정권의 탈선과 무능에 가려지면서 소박 청렴한 촌부(村夫)이미지와 국정에 전념하는 좋은 측면만 상대적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대통령은 주변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못했다. 청와대 안의 야당이었던 陸英修(육영수)여사와 국정을 어지럽힌 金賢哲(김현철)씨의 상반된 영상도 박정희향수의 한 배경일 것이다.
▼ 국민의 매서운 눈과귀▼
만약 박대통령이 지금 90년대의 집권자였다면 엄청난 국민적 저항을 배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국민들의 의식은 높아져 있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은 그 변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기회를 잃었다. 90년대에 60,70년대식 권위정치를 해온데서 그의 비극은 잉태되었다. 개인이든 정권이든 일단 자정(自淨)능력과 복원력을 상실하면 눈밖에 난다. 국민들의 눈과 귀는 지금 정확하고도 무섭다.
남중구<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