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대학교수와 고위경제관료를 지낸 원로(元老)와 대화하는 과정에 들은 얘기가 새삼스레 생각난다. 그분이 독일 경제학자가 쓴 책에서 읽었다며 소개한 내용은 『어떤 사회가 제대로 되려면 법률가 학자 언론인 금융가가 제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네탓」만 하고 있지만 사실 한보사태는 이들 전문직업인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은 모두 「독립성」이 유난히 강조되는 직업이며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다.
▼ 끊임없는 외압시비
한보비리와 金賢哲(김현철)씨 비리의혹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면서 언론계 일각에서 제기된 때늦은 「자성론」역시언론이제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검찰총장의 2년 임기제와 중임(重任)금지를 법으로 규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임기동안 어떠한 외부압력에도 흔들리지 말고 소신껏 직무를 수행해야 나라가 제대로 된다고 국민이 믿기 때문이다. 검찰수사 독립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한보비리 수사실패로 대검 중수부장이 경질되는 수모를 당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은행장과 전직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사법처리문제와 관련, 외압시비에 휘말려 있다. 검찰수뇌부와 한보수사팀은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다.
金起秀(김기수)검찰총장은 지난 4일 대검찰청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에 출석해 의원들의 「鄭泰守(정태수)리스트」 공개요구를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의 진술만으로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는 『조사도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아느냐』는 의원들의 반박에 『수사력과 시간의 낭비』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그후 『죄가 안된다』는 김총장의 공식입장과는 달리 한보수사팀은 정치인들을 줄줄이 소환조사했다. 그 결과 수사팀은 형사처벌 대상이 7,8명이나 된다는 내부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총장은 과연 지금도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들이 「무죄」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당시 답변은 「외압(外壓)」이나 「판단잘못」 때문이었다고 시인할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정치인수사에 「음모」가 있다고 할 것인가.
검찰 수사에 외압이 있다면 그것은 김총장이 자리를 걸고 막아야 할 일이다. 만약 김총장이 「국가경제나 정권에 미칠 영향」을 이유로 수사팀에 외압을 가한 주체라면 수사팀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국민이 그 결과를 신뢰할 리 만무다.
결국 오늘 검찰의 위기는 그것이 외압(外壓)때문이든 검찰수뇌부의 내압(內壓)때문이든 김총장의 「직무유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결단 내려야할 때
솔직히 김총장의 고민을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김총장은 金泳三(김영삼)대통령과의 사연(私緣)에 힘입어 검찰총수가 된 처지가 아니던가.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정권의 실세들을 줄줄이 구속했다. 그런 마당에 또다시 민주계 인사들이 상당수인 「정태수 리스트」와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 그리고 대선자금을 수사한다는 것은 김총장에게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총장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검찰 살리기」의 협조자로 명예롭게 퇴임할 것인지, 「검찰 죽이기」의 방조자가 될 것인지를.
권순택(사회1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