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이중적 인식구조」를 빼놓고 한국 정치의 왜곡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보스정치」 「계보정치」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주역들을 유능한 정치인으로 평가한다. 돈을 가까이 하고 많이 쓰는 정치인을 비난하지만, 그렇다고 「돈없는 정치인」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한보자금을 받았다가 불명예스럽게도 검찰에 소환됐던 이른바 「鄭泰守(정태수)리스트」의 당사자들도 들통이 나기 전까지는 정치권 안팎에서 대부분 「통이 크다」 또는 「능력있다」는 평을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한묶음으로 철창신세를 지게 된 신한국당의 洪仁吉(홍인길)의원과 국민회의의 權魯甲(권노갑)의원이다.
지난 30년 가까이 한국정치에 커다란 족적(足跡)과 공과(功過)를 남긴 양대 가문, 즉 「상도동」과 「동교동」의 집사장인 두사람의 철창행에 함축된 의미는 매우 복잡하다. 보는 시각도 계보정치가 낳은 희생양이라는 동정론에서부터 계보정치의 한계이자 말로라는 비판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아무튼 한보청문회에 나온 두사람의 표정이나 언행에서 별로 죄의식을 읽기 어려웠다는 점은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병폐의 현주소와 관련, 주목할만한 일이다. 굳이 「깃털론」을 다시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얘기에서 『정치는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고, 또 모두들 그렇게 해왔는데 왜 우리들만 죄인이 돼야 하느냐』는 항변이 강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홍의원은 『내가 그 돈으로 땅 한평 산 적 있느냐』고 반발했다. 심지어 홍의원은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이 지난 93년 취임초 「기업으로부터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한 사석에서 『영감(김대통령을 지칭)이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혼자만 안받겠다는 것이냐』며 어이없어 했다는 게 한 여권인사의 얘기다.
이같은 한국정치의 왜곡상은 인물중심의 「인치형(人治型)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은 30여년간 계속돼온 군사독재체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보스정치」 「계보정치」의 본산으로 지목되는 이른바 「3김씨식 정치」도 따지고 보면 군사독재체제의 산물이다. 독재자들은 막강한 권력과 금력으로 계보를 형성했고 그에 항거했던 야권지도자들은 국민적 지지, 즉 「득표력」으로 계보를 이끌었다.
득표력은 곧 공천권으로, 공천권은 국회에 대한 영향력으로, 이는 기업들로부터의 정치자금 동원력으로, 자금력은 계보관리능력으로 연결되는 「병리(病理)구조」를 낳게 된 것이다.
지난 92년 14대 국회의원총선 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24명의 전국구 후보들을 공천하면서 8명으로부터 평균 30억원씩의 「헌금」을 받았다. 이른바 「전국구(錢國區)」케이스. 이렇게 받은 돈은 당의 총선자금과 돈없는 후보들에 대한 지원비로 쓰였다. 전국구 공천으로 계보원을 만들고, 그들이 낸 돈으로 다시 다른 계보원을 지원하는 「사슬」이 형성된 셈이다.
「돈공천」은 비단 전국구 뿐이 아니다. 지역구 공천에서도 돈을 받은 경우가 비일비재고 여야를 가릴 것도 없다. 돈으로 공천을 따내 국회에 들어간 사람들이 「본전(本錢)」을 찾기 위해 어떤 행태를 보일는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 김대통령과 국민회의의 金大中(김대중) 자민련의 金鍾泌(김종필)총재 등 이른바 「3김씨」가 한국정치에 기여한 「공(功)」을 일정부분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그러한 「인치형 정치」를 청산하자는 주장이 거세지는 것도 바로 이같은 병폐 때문이다.
문제는 이같은 정치행태가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말로는 「고비용 정치구조 개선」을 외치면서도 실제 여야 대선주자 진영에서 「줄서기」 「줄세우기」 「돈풀기」 「돈받기」 등 청산돼야 할 병폐가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퍼붓지 않고는 유지 관리하기 힘든 「사조직」들도 정치권의 뒷마당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최근 중앙선관위는 여야의 대선주자 12명에 대한 사조직 실태조사를 벌였다. 그결과 중앙선관위는 23개의 대선주자 관련 사조직을 밝혀냈다. 신한국당의 李會昌(이회창)대표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 「21세기 교육문화 포럼」 등 8개, 李洪九(이홍구) 朴燦鍾(박찬종) 李漢東(이한동)고문과 金德龍(김덕룡)의원 등이 2개씩, 李仁濟(이인제)경기도지사가 3개, 국민회의의 김총재가 「김대중후보추대위」 등 4개다.
사조직의 병폐와 관련, 李南永(이남영·정치학)숙명여대교수는 『현재 대선주자들이 이념이나 정책개발보다는 사조직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며 『사조직이 판칠 경우 공조직의 기능을 무력화시킬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교수는 또 『金賢哲(김현철)씨의 국정개입 논란이 빚어진 것도 사조직의 확장과 월권에서 비롯된 만큼 사조직이 발붙일 수 없도록 지금부터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영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