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법 실태]
여야 정치인들은 지난 94년 정치자금법을 개정하면서 「장난」을 쳤다. 정치자금법 11조 「정치자금을 기부하고자 하는 자는 기명으로 선관위에 직접 기탁해야 한다」는 조문 앞에 「정당에」라는 단어를 슬쩍 삽입한 것이다.
정치자금법 11조에 「정당에」라는 세 글자가 들어감으로써 정치인은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검은 돈」을 받아도 뇌물 알선수재 공갈 협박 등 다른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 한 처벌받지 않게 됐다. 그야말로 「교묘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번에 「한보리스트」에 올라 검찰조사를 받았던 정치인들이 한보라는 부도덕한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도 『조건이 없는 떡값』이라며 「억울하다」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친 것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 「안전장치」 때문이다.
결국 현행 정치자금법은 「검은 돈」의 정치권유입을 막을 수 없어 「있으나마나한 법」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65년 정치자금법이 제정된 이래 정치자금법 위반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현역의원은 한명도 없다. 한보사건으로 이같은 문제점이 드러나자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은 즉각 정치권의 음성적인 정치자금 수수를 차단하기 위한 정치자금법 개정안 입법청원을 국회에 냈다. 핵심내용은 청탁성뇌물이 아니더라도 비공식적으로 돈을 받았을 경우에 대한 엄격한 처벌조항을 신설, 음성적인 돈거래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 시민단체들은 또 △법인의 기부행위 금지 △지정기탁금제 폐지 △「익명기부제」 폐지 등 정치자금법의 근본적인 손질을 주장하고 있다.
참여연대 金炯完(김형완)의정감시센터사무국장은 『후원회비를 비롯한 모든 정치자금의 선관위 회계보고를 의무화, 자금의 유통구조를 투명하게 밝힐 수 있도록 「정치자금실명제」를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익명기부제의 폐지와 관련, 김국장은 『야당의 반발도 예상되지만 궁극적으로 소액다수주의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정치권 밖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요즘 여야의 정치자금법 개정논의를 살펴보면 결국 「체면치레용」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실제로 여야의 논란은 지정기탁금제의 존폐를 둘러싼 해묵은 논란에 한정돼 있는 느낌이다. 야당은 지정기탁금제를 「여당의 독식(獨食)창구」라며 폐지를 주장하고 여당은 「기탁자의 자유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물론 지정기탁금제는 현행 정치자금법이 안고 있는 불합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현정부 출범이후 1천억원이 넘는 지정기탁금이 전액 여당으로 갔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재벌과 권력의 유착이라는 부패구조를 온존시키는 제도라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가 지정기탁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공식적인 정치자금 조달방법인 국고보조금이나 후원회제도의 문제점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이런 제도들 자체가 세계적으로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기형적인 제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우선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은 매년 유권자 1인당 8백원씩의 혈세(血稅)로 이뤄진다. 그리고 선거가 있는 해에는 그 갑절만큼 추가보조가 있게 된다. 국민들은 지지여부를 떠나 돈을 내야 하는 불합리를 안고 있다. 국가기관도 아닌 정당에 국고지원이 이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외에도 국민참정권의 왜곡이며 「1인보스정당」을 온존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 많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대안으로 「매칭 펀드(Matching Fund)」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일반납세자들이 연말정산 때 소액의 정치자금을 내겠다고 동의하면 정부가 이 돈을 모아 출마자들의 선거비용 등을 보조하는 식으로 정치자금 조달방법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후원회제도 또한 문제가 없지 않다. 우리나라의 후원회는 기본적으로 정치인이 학연 혈연 지연 등의 인맥을 총동원, 자금을 끌어들이는 조달창구다. 연간 1억5천만원, 그리고 선거가 있는 해에는 3억원까지 모금을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외국에도 후원회제도가 있지만 우리 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외국은 「인물후원회」가 아닌 「정책후원회」다. 모금의 주체 역시 정치인이 아닌 유권자다. 따라서 공급자 위주의 자금동원체제가 아닌 사용자 위주의 자금지원체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차제에 정치자금법의 근본적인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위해서는 정치자금법 개정작업을 정치인들의 손에 맡겨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朴載昌(박재창)숙명여대교수는 『정치자금법은 정치권과 격리된 독립된 기구에서 기본적인 초안을 마련하고 국회는 이를 심의하는 기술적 역할에 한정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지적들에 대해 정치권은 즉각 『한국정치의 「현실」을 무시한 지나친 이상론』이라고 반론을 편다. 또 이를 수긍하는 전문가들도 없지 않다. 李政熙(이정희)외국어대교수는 『정치자금은 「필요악」이다. 국고보조 등은 깨끗한 정치를 이루기 위한 일정기간의 국민 투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논의의 출발점은 정치인과 유권자의 자세전환, 즉 정치풍토의 쇄신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모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법과 제도는 현실개선의 방편에 불과하고 파행적 정치자금조달의 원인인 한국정치의 부패구조가 청산되지 않고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철희기자〉
▼ 정치자금법 어떻게 바뀌었나 ▼
정치자금법은 지난 65년 2월 제정된 뒤 여덟차례에 걸쳐 개정됐다. 법개정은 주로 후원회 등 모금수단을 확대하고 국고보조금을 증액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
특히 음성자금의 양성화 취지에 따라 정치권은 자금조달창구를 계속 넓혀갔고 이 과정에서 정치자금 유통구조의 투명성은 그만큼 상실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처음 제정된 정치자금법은 정치자금제공행위의 양성화를 위해 누구든지 정치자금을 중앙선관위에 기탁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지정기탁을 할 때에는 두개 이상의 정당을 지정하도록 했고 비지정기탁금은 70%를 의석비율로, 30%를 동일 비율로 원내정당에 지급토록 했다.
그러나 69년 1차개정 때 비지정기탁금의 60%를 제1당에, 40%를 나머지 원내정당에 의석비율로 배분토록 함으로써 집권 공화당에 정치자금이 편중되기 시작했다.
그후 80년 정치자금법은 국보위에 의해 전면 개정됐다. 그때까지 정당법에 포함돼 있던 관련규정이 모두 정치자금법으로 통합됐다. 또 기탁금 이외에 국고보조금과 후원회 당비에 관한 규정을 신설, 자금원을 다양화했다. 그러나 5공정권 때까지 정치자금은 사실상 집권당이 독식했다.
이후 9년만에 이뤄진 4차개정 때 중앙당에만 둘 수 있었던 후원회를 시도지부와 지구당 국회의원도 둘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국고보조금을 정액화, 예산에 의무적으로 계상하도록 했다.
5차개정(91년)에서는 지구당 등의 후원회 회원수를 1백명에서 2백명 이내로 증원했고 국고보조금도 매년 유권자당 4백원이던 것을 6백원으로 증액하고 선거가 있는 해에는 3백원씩을 추가하도록 했다.
이어 6차개정(92년)에서는 익명기부를 1회에 1백만원에 한해 허용하고 선거가 있는 해의 추가보조금을 유권자당 3백원에서 6백원으로 상향조정했다.
또 7차개정(94년)에서는 후원회 회원수를 중앙당의 경우 2천명으로 늘렸고 국고보조금도 유권자당 8백원으로 인상했다. 지난해 말 8차개정에서는 지구당과 개인에 한정돼 있던 무기명 영수증제(일명 쿠폰제)를 중앙당과 시도지부까지 확대하고 쿠폰의 종류도 최고 1백만원권 등 2종을 신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