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보트피플]베트남 「보트피플」사례

  • 입력 1997년 5월 13일 08시 04분


지난 75년 월남의 패망과 함께 시작된 베트남 난민의 대탈출은 80년대 후반까지 10년 이상 계속됐다. 유엔고등판무관실 등이 파악한 난민의 수는 4백만∼5백만명. 이중 1백50만명이 조그만 목선 등에 생명을 맡기고 정처없이 망망대해로 나선 보트피플이다. 이들은 새로 들어선 정부의 학살을 피해 어선이나 소형 돛단배 심지어 고무보트까지 이용,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했다. 베트남 당국의 추적을 피해 무조건 넓은 바다로 떠난 난민들은 폭풍우를 만나거나 워낙 작은 배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승선한 탓에 배가 침몰, 몰사하는 등 자유를 찾으려던 여정을 비극으로 끝맺기도 했다. 어려운 항해끝에 인접국에 도착한 보트피플은 초기에는 「정치적 난민」으로 취급돼 미얀마 라오스 태국은 물론 멀리 떨어진 홍콩 싱가포르 한국 중국 등에 정착하거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으로 건너가는 등 비교적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지나가던 화물선들도 이들을 구조, 자유를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탈출이 계속되면서 이들의 정착이 사회문제화되고 자국 노동자들과의 갈등관계까지 나타나자 태국 필리핀 등 보트피플이 집중적으로 몰려들던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은 해상을 봉쇄, 난민의 입국을 막기에 이르렀다. 보트피플을 선선히 받아줄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 공공연해지자 화물선 등 큰 선박들도 구조를 외면하게 됐다. 심지어 난민들이 지닌 금품을 약탈하는 「해적」까지 생겼다. 초기에 베트남을 떠난 난민의 상당수가 월남의 기득권 계층과 부유층들이서 상당한 돈과 보석 등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89년4월에는 남중국해를 떠돌던 어린이 20명 등 베트남 난민 1백30명이 태국 어부들에 의해 학살당해 「바다의 아우슈비츠」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처음에 난민을 받아들였던 나라들도 80년대 후반부터는 난민들의 자국 귀환을 종용하는가 하면 강제송환에 나섰다. 당시 베트남을 탈출한 사람들은 공산화된 베트남의 「평등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베트남의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뛰쳐나온 경제적 난민이거나 자발적 또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몰려난 실업자들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트피플의 탈출러시속에 우리나라도 77년5월부터 30여 차례에 걸쳐 난민의 입국을 허용, 1천3백여명을 부산 난민수용소에서 보호해 왔으나 이들을 조금씩 제삼국 또는 베트남으로 보내 지난 93년2월 마지막으로 1백50명이 뉴질랜드로 떠나 수용소의 문을 닫았다. 〈구자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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