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자금 문제가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지난 95년 가을 「노태우(노태우)비자금」 사건 때부터였으나 그래도 그동안은 여야간 전선(戰線)에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이 23일 「공개거부」 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제 여야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전투의 성격은 여야 모두에게 「악전(惡戰)」이다. 더이상 물러서기도 앞으로 나가기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의 입장에선 「공개거부」가 물론 마지막이자 불가피한 선택인 듯하다. 공개해도 안해도 벼랑끝에 몰릴 바엔 현상태에서 버티자고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더나아가 아들(賢哲·현철씨)까지 구속된 마당에 좌고우면할 게 없이 임기말을 「내 식대로」 마무리짓고 국정운영능력 회복을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결의도 엿보인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결단에 대해 야권이 즉각 「하야」를 거론하고 나선 것도 「외통수」적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고 金大中(김대중)국민회의총재가 여러차례 공언해왔듯이 정말 「하야」까지 몰아붙이겠다는 뜻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속내야 어떻든 강공을 주저할 경우 직면할 여론의 반작용을 생각하면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최근 양김씨, 즉 김대통령과 김총재간의 「데탕트 무드」 형성과정에서 보듯 자칫 엉거주춤한 공격자세를 드러낼 경우 「3김 동반론」에 휘말려 대선자금 공개를 거부한 김대통령과 함께 공멸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더구나 야권은 김대통령이 아직 여권의 정권재창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버티기」 자세를 고수하는 것으로 본다.
이같은 정황과는 별개로 또한가지 의미있게 볼 대목은 여야의 전열이 재정비된 양상이다. 여권의 경우엔 김대통령과 李會昌(이회창)대표의 관계가 가시적으로 「2인3각화」됐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그동안 대선자금문제에 대한 김대통령의 고백을 주장했던 이대표가 입장번복에 따른 이미지훼손을 무릅쓰고 공개거부 입장을 적극 뒷받침함으로써 민주계의 거부감을 상당부분 무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상황은 앞으로 야권의 주공(主攻)목표가 이대표로 설정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하고 김대통령의 대리전을 치르게 될 이대표는 한층 강력한 방어 또는 반격 태세를 갖출 것으로 보인다.
또 단기적일는지 모르나 그동안 다소 소원한 관계였던 국민회의와 자민련도 공조의 틀을 복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대선공조의 분위기가 상당히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전선 도처에 전황(戰況)을 완전히 뒤엎을만한 지뢰들이 묻혀있다는 점이다. 한보사태나 「김현철비자금」 수사과정에서 대선자금의 일단이 드러날 개연성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김대통령의 회심의 결단은 「장고(長考)끝의 악수(惡手)」가 될 수밖에 없다.
〈임채청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