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자금 파문 전말]서둘러 덮은 「판도라 상자」

  • 입력 1997년 5월 25일 19시 56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불릴 수 있는 92년 대선자금 문제가 제기된 것은 지난 95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찰이 盧泰愚(노태우)전대통령 비자금사건 수사에 들어간 직후 당시 북경에 가있던 국민회의 金大中(김대중)총재가 『노전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자연스럽게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대선자금으로도 불똥이 튄 것이다.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은 당시 『노전대통령이 당총재 시절에는 당비를 댔으나 나를 통해 준 일은 없다.노전대통령이 92년9월18일 탈당한 뒤에는 그와 만난 일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같은 김대통령의 언급은 강한 부정으로 들리기도 했지만 92년 대선에서 민자당이 노전대통령으로부터 수천억원대의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야권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인하지는 않은 것으로 해석됐다. 그후 야권은 김대통령이 후보시절 노전대통령으로부터 거액을 지원받은 것외에도 노씨의 친인척인 현역의원을 통해 2천억원의 대선자금을 지원받았다는 등의 공세를 계속 폈다. 이에 맞서 여권도 김대중총재가 20억원외에 노씨로부터 받은 돈이 더 있다는 「20억원+α」설을 제기하면서 「공세적 방어」에 나섰었다. 그러나 검찰이 비자금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92년 대선자금」부분을 비켜가버리자 여야 정치권의 불꽃튀는 공방도 금세 사그라들어버렸다. 그러던 중 1년 3개월여만에 꺼져가던 「92년 대선자금」 불씨에 기름을 붓는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통령에게 수백억원의 대선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던 한보철강의 부도사건이 난 것이다. 한보부도사건 수사에 나선 대검중수부는 洪仁吉(홍인길) 權魯甲(권노갑)의원 등 여야 핵심인사들을 6명이나 구속하고 한보그룹 鄭泰守(정태수)총회장도 세번째 쇠고랑을 채웠다. 그러나 검찰수사에 대해 「깃털」만 사법처리하고 특혜대출 의혹의 「몸통」을 파헤치지 않은 채 수사를 축소했다는 비판여론이 빗발쳤다. 특히 2월 임시국회에서 은행장이나 정치인들에게 수억원대의 뇌물을 주지 않고도 가능했던 한보의 초기대출은 「92년 대선자금」이 아니면 설명이 안된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국민회의 金景梓(김경재)의원 등이 『92년 대선때 정총회장이 6백억원의 대선자금을 지원했고 그 돈을 김영삼후보의 돈심부름을 하던 金賢哲(김현철)씨가 받아갔다고 한다』고 폭로했다. 이처럼 92년 대선자금이 「현안」으로 대두되는데도 김대통령은 2월25일 대국민담화에서 『과거 후원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다소 한가하게 답했다. 그후 대선자금 문제는 민심수습 차원에서 단행된 개각과 黃長燁(황장엽)전노동당비서 망명 등의 굵직 굵직한 사건의 홍수 속에서 잠시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여야 합의로 한보청문회가 열려 정총회장 홍인길의원 김현철 朴泰重(박태중)씨 등 대선자금과 관련된 증인들에 대한 신문과정이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새로운 의혹사실들이 연이어 폭로됐다. 특히 92년 대선이 끝난 직후인 12월31일 산업은행이 한보철강에 4백57억원의 외화대출을 해주는 등 한보 초기대출은 대선자금과 연관을 짓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야당의원들은 맹공을 퍼부었다. 『정총회장이 김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6백억원을 건네 주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언론이 대검의 수사진척상황과 대선자금에 대한 의혹을 하나하나 전하면서 대선자금의혹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국의 현안」으로 떠 오르고 말았다. 이같은 과정에서 여권은 「92년 대선자금」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놓고 「전면공개→ 공개불가→ 포괄적 공개→ 공개불가」로 오락가락하는 입장변화를 보였다. 〈최영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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