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얘기를 해서 안됐지만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뿐 아니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람의 마음은 특히 그렇다. 이때문에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 혼자 그렇게 주장하는게 아닌 모양이다. 우리 민족의 특성이 결코 은근과 끈기는 아닌 것 같다. 요즘 대통령에게 겨누어지는 시퍼런 칼날같은 눈길들을 보면 나는 사랑이 끝난 뒤의 잔인함과 추악함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해진다.
5년전 우리가 그에게 거의 맹목적으로 쏟아부었던 애정을 기억하는가.
문민정부라는 화려한 수식어, 『이대한(위대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형편없는 발음에도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쳐대던 박수, 틀림없이 「개핵(개혁)」을 이룰 것으로 여기던 뜨거운 믿음…. 그것들이 다 「거품 사랑」이었단 말인가.
안다. 대통령은 거의 모든 면에서 우리의 사랑과 기대를 배반했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부정직과 말바꾸기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시시때때로 말이 달라지면 신의를 잃는 법. 대통령이 하는 말이 하룻밤 사이에 표변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공직자의 공언을, 어른 말씀을, 애인의 달콤한 구애를 믿을 수 있나. 『한푼도 안받았다』고 했다가 『자료가 없어 못밝힌다』고 하던 대통령이 『이제부터 내 말은 진짜』라며 두루뭉실하게 『앞으로 잘하자』는 말로 끝낸다면 우리는 정말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 난감하다.
그런데도 문제는 우리 사이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매몰차게 돌아설 수 없다는데 있다.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정면돌파!』를 주장하던 「창조적 파괴력」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 믿은 것은 내 탓이니 내 발등을 찧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계약상」 임기를 채우기까지 아홉달이나 남아 있고, 그때까지는 미우나 고우나 뒤통수라도 보고 살아야 한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비록 마음은 돌아섰어도 당당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우리네 속내다. 매독이 무서워 정을 못주었으랴.
그래도 당시엔 진실했던 그 열정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사랑해준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김순덕<문화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