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어령/피라미드와 대선주자들

  • 입력 1997년 6월 29일 20시 21분


세계 칠대불가사의의 하나로 손꼽히는 피라미드는 지금도 그 연구가 끊이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 어느 외국 고고학자의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피라미드를 보는 그 다양한 시선과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에 대해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기술로 세운 백화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려앉는 꼴을 보고 사는 우리로서 기원전 그 옛날의 피라미드가 내진설계(耐震設計)로 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의 구조물 사이에 일정한 간극을 만들어 그 안에 모래를 넣어 지진의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장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복합적 통치시스템 ▼

한편에서는 피라미드를 수학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즉 피라미드의 네변을 보태 높이의 2배로 나누면 놀랍게도 3.14…의 원주율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높은 피라미드를 잴 수 있었던 것은 최근에 발굴된 목재 원반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당시에 벌써 계측륜(計測輪)을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밝혀낸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라미드를 공공투자의 시조(始祖)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적 풀이다. 헤시오도스의 「역사」에도 20년 걸려 만든 피라미드 이야기가 나오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피라미드의 대 역사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압제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다. 나일강이 범람해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 왕은 피라미드의 공사를 벌여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노임을 지불해 생계를 유지하도록 한 경제정책의 산물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런가하면 피라미드를 이집트의 왕권과 정치적 통치술로 조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종교에 의하면 왕만이 사후에도 저승의 삶을 누릴 수가 있었지만 피라미드의 건축에 참여한 백성들은 왕을 따라 재생할 수 있다는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즉 피라미드는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시스템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 수학 경제, 그리고 정치권력과 같은 다양한 시각들과 그 현란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모자라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피라미드를 보는 눈에 문화라는 본질적인 시점이 결락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피라미드는 무덤이다. 이집트인의 「사생관(死生觀)」이라는 문화에서 탄생된 것이다.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한 희랍인들은 일찍부터 죽으면 화장을 해버렸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재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체를 미라로 만들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거대하고 영원한 피라미드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 문화분야 왜 언급않나 ▼

불가사의한 피라미드의 기술도, 절대 왕권의 통치술도 따지고 보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과 신앙을 토대로 한 문화적 현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죽어도 되살아 나지 못한다는 영원의 죽음이었으며 그 공포의 벌로 다스린 것이 42의 대죄(大罪)다.

「왜 난데없는 피라미드요, 문화론인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왜 지금 새삼스럽게 문화인가. 그것은 그 많은 대선주자들이 텔레비전이나 신문지상에서 정치 경제 사회문제는 귀따갑게 말하지만 막상 그것들의 본질이 되는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들려오는 것이 없기에 하는 소리다.

이어령(이화여대 석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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