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 朴燦鍾(박찬종)고문은 19일 서울 합동연설회에서 경선후보직을 전격 사퇴하기 전 연설의 대부분을 자신이 신한국당 입당 이후 걸어온 길을 회고하는데 사용했다.
박고문은 먼저 96년 4.11총선 직전 신한국당에 입당한 경위를 회고했다.
『87년 金泳三(김영삼) 金大中(김대중)후보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노력하다 좌절한 뒤 8년간 3김정치 종식과 세대교체를 외치며 풍찬노숙(風餐露宿)했다. 작년 총선 직전에 김대통령이 「옛 정을 생각해서 신한국당에 입당, 총선 승리를 위해 도와달라」고 간곡히 권유해 망설인 끝에 수락했다』
실제로 박고문은 입당 직후 수도권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유세장을 전전했고 특히 신한국당이 서울에서 여당 사상 최초로 야당을 누르는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박고문 자신은 자청해서 전국구 22번을 배정받아 낙선했다.
그는 이날 『처음 전국구 2번을 제의받았을 때 내 아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소개하고 『그러나 나는 22번을 자청했고 낙선했으며 20년동안 사용해온 국회 의원회관의 방은 지금 姜聲才(강성재)의원이 쓰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잠시 더듬었다.
박고문은 또 이날 연설에서 李會昌(이회창)후보 캠프에 합류한 吳世應(오세응) 洪準杓(홍준표) 金文洙(김문수)의원과 李壽成(이수성)후보 진영에 참여한 강성재의원의 이름을 들며 『4월의 그 추운 새벽, 사과상자 위에 서서 손으로 마이크를 만들며 선거운동을 지원한 게 바로 이 박찬종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낙선 후 신한국당 고문에 임명된 그는 각종 언론 여론조사에서 「국민지지 1위」를 기록한 「민심(民心)」을 바탕으로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막판으로 가면서 대의원 지지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일부 후보진영에서 「세몰이」를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대의원들까지 「포섭」해가자 그는 이회창후보의 「금품살포설」를 비롯한 경선불공정 시비를 제기한 끝에 결국 후보를 사퇴하고 말았다.
박고문은 그러나 이날 사퇴선언 직후 『잠시 사라지지만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국민 앞에, 그리고 정화된 신한국당 앞에 기적적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김창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