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지명관/정치무대 배우와 관객

  • 입력 1997년 11월 2일 19시 49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우려를 품거나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은 이 나라 국민이면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그날의 정치뉴스에 접하면서도 그것들을 좀더 길게 정치사적으로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같다. 오늘도 오랜 한국정치, 특히 반세기 남짓한 해방 후의 정치사에서 거듭 보아온 역겨운 현상이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나 또한 분명히 이 사회는 민주화되었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경우도 결코 없지 않다. 4, 5개월 전 한보사태니 김현철사건이니 하고 떠들썩하면서 92년도 대선자금이 크게 문제되었을 때를 상기해보자. 국민의 여론, 그것을 반영하려는 신문의 귀추에 모두가 주목했다. 대선자금 문제가 더욱더 번져가면 대통령 하야설까지 나올 형편이었다. 그러나 격앙됐던 여론은 검찰의 한보나 김현철사건 처리에 불만족스러워하면서도 그것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 역겨운 현상의 반복 ▼ 거기에는 국민과 매스컴의 양식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정은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강한 도덕적 또는 법적인 심정이 작용하면서도 5년 단임 임기의 대통령을 도중에 하차시키는 혼란과 불행은 없어야 된다는 정치적 판단과 양식이 자제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세력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국민여론이 그들을 자제하게 했다고 하겠다. 정치라는 무대에서 정치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연기자들을 때로는 달리게 하고 때로는 멈추게 하는 것이 관객인 국민이고 그 뜻을 반영하는 것이 매스컴이라고 한다면 그 사회는 성숙된 민주사회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유사한 모습을 이번 김대중비자금 운운이라는 문제에서도 볼 수 있다고 느껴진다. 무대에서 연기자들은 자기들의 승리를 위해서 상대편의 약점이라고 보이면 무엇이든지 들추어 내서 대서특필 선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국민의 여론은 그것을 끝까지 밝히고 심산유곡 물처럼 사회를 맑게 하고 싶어하면서도 때로는 그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명한 정치적 판단이란 언제나 현실적이며 총체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지금까지 한국 현대정치 반세기에서 관행처럼 되어온 음모정치를 싫어한다. 이제는거의 모든 국민이 독재하에서처럼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는 식으로 정치에 사활을 걸지는 않는다. ▼ 국민을 위한 무대 돼야 ▼ 국민은 이번 대선을 혼란없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정치사에서 빛나는 선거로 치르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국회에서 그런 의지를 보여주는 선거법 손질을 어서 끝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비자금 운운의 문제 역시 대선 전에는 수사하지 않겠다는 검찰의 발표로 주춤하게 됐다. 정치무대 위의 연기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에 의해서 정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서 미국을 택했던 위대한 여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를 생각하게 된다. 1975년 그의 파란 많은 인생이 막을 내릴 무렵, 그는 퍽 외로워했고 미국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두운 것이었다. 그렇게도 그가 찬양해 마지 않았던 미국의 민주주의도 이제는 정치가들에 의해 좀먹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학이란 정치무대 위에 선 정치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연기자를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관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어쩐지 오늘 한국의 우리들을 위해서도 아렌트가 남겨준 귀중한 지혜인 것처럼 생각된다. 지명관 (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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