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국가연합 (ASEAN)의 리더국중 하나인 말레이시아가 85년부터 소위 「동방중시정책」(Look East Policy)을 선언하고 한국과 일본을 경제 발전의 모델로 삼겠다고 나선 지 13년이 되었다.
당시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이 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2천5백달러로 자기 나라와 비슷한 한국을 배우겠다며 대학에 한국학 과정을 개설하거나 학생들을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 학생들이 국가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말레이시아가 단지 경제성장의 틀을 배운다는 목적에서라면 한국이 아닌 일본이나 다른 유럽 선진국을 모델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을 포함시킨 것은 지리적으로 일본에 근접한 동방 국가여서가 아니었다. 인종폭동을 겪은 바 있는 다인종국가인 말레이시아로서는 경제발전과 함께 국가의 통합과 화합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인의 역동성 정치발전 등 오히려 경제외적인 능력을 배우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선을 눈 앞에 둔 우리 정치계의 진흙탕 싸움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에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을지 안타깝기만하다. 아무리 정당의 목표가 정권을 잡는 것이라고 하여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 정치인들은 국가를 위한 정치가 아닌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정당만을 위한 정치를 지향하는 듯하다.
말레이시아 정치인들은 국수주의적일 만큼 철저하게 국익을 위한 정치를 지향한다. 우선 이들은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정책이나 비전을 제시하여 그 성과를 토대로 국민의 지지를 호소한다.
이러한 정치 안정을 토대로 말레이시아는 70년부터 20년간 전반적인 경제수준 향상과 인종간 계층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목표로 한 1차 장기발전계획 및 신경제정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91년부터 2000년까지의 2차 장기발전계획 및 국가개발정책을 실행중이다. 작년 실질경제성장률은 8.2%를 웃돌아 경기가 성공적으로 연착륙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자원이 풍부하고 정치가 안정되어 있으며 공무원 비리 예방의 일환으로 총리 이하 모든 공무원이 명찰을 패용한 나라, 집권당의 전당대회에 무효판결을 내리는 눈치를 보지 않는 법원이 살아있는 말레이시아는 우리가 범한 시행착오를 건너뛰어 우리보다 훨씬 앞서 갈 수 있는 나라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두렵다.
고영훈(한국외국어대교수/말레이인니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