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②/문민개혁의 탄생]사라진「동숭동 프로젝트」

  • 입력 1998년 1월 2일 20시 41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동숭동팀’이 준비한 개혁의 지평(地平)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동숭동팀’의 ‘개혁정책안(案)’과 ‘국정운영계획―대통령 당선자를 위한 비망록’은 한마디로 ‘쿠데타적 발상’을 담고 있었다.

정부조직을 절반으로 줄이고, 기업활동을 가로막는 각종 행정규제를 과감하게 없애자, 공기업을 철저히 민영화하고 금융을 자율화하자, 그래서 30년 이상 묵은 ‘관료주도 발전모델’을 혁파하자는 것이 ‘동숭동 프로젝트’의 기본개념이었다.

그러나 ‘동숭동프로젝트’는 실종되고 말았다. 국가부도사태까지 공공연히 거론되는 지금, ‘동숭동 프로젝트’의 실종은 단순히 ‘아쉬움이 남는다’며 넘어가기에는 너무 뼈아픈 내용들을 담고 있었던 셈이다. 이 설계도 작성에 참여한 한 핵심인사는 “근대화 이후 한번도 시도되지 않은 국가경영 체계의 대(大)수리”라고 자평했다.

‘동숭동팀’의 핵심멤버였던 주돈식(朱燉植)전청와대 정무수석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혁작업은 동숭동에 있던 ‘임팩트 코리아’에서 이뤄졌다. 이 개혁그룹의 회의 진행과 토의 내용은 문민정부의 개혁골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 체계화해서 시행했더라면 좀 더 알찬 개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주전수석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 거론되기 이전인 지난해 11월 출판된 ‘문민정부 1천2백일―화려한 출발, 소리없는 실종’에서 이미 이런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병민(田炳旼)씨 역시 “동숭동 개혁안의 가장 큰 목표는 국가경영쇄신”이라며 “요즘 IMF가 요구하고 있는 것들의 상당수가 포함된 개혁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최근 동숭동팀의 분과위원회별 간사역할을 맡았던 40대 실무자들(‘중령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최초로 동아일보에 공개한 ‘개혁정책안’과 ‘국정운영계획―대통령 당선자를 위한 비망록’은 한마디로 개혁을 넘어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다.

개혁안의 핵심 중 핵심은 규제개혁.

정부부처 출신의 한 ‘중령’의 증언. “공장 하나 짓는데 도장이 3백개나 필요한 상황에서 경제활성화 운운하는 것은 공염불이라는 게 동숭동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김대통령이 하실 말씀자료를 규제개혁으로 잡았습니다. 그냥 규제완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규제개혁 성적에 따라 장관들을 평가하겠다’는 ‘통첩성 말씀자료’를 준비했습니다. 규제를 다 털어버리지 못하면 장관자리도 내놓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역사적인 문민대통령의 첫 국무회의 지시사항으로 그 말이 나가고, 또 김대통령이 실제로 규제개혁 성적표에 따라 장관임면을 했다면 오늘날 나라꼴이 이 모양으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부조직 및 행정구역 개편안도 지금까지 한번도 시도되지 않은 것이었다. 기본개념은 종전처럼 일부 부처를 통폐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짜는 ‘헤쳐 모여식(式)’이었다.

결론은 2원(院)12개 부처안. 23개 정부부처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개편안이었다. 경제기획원을 폐지하고 예산실은 국무총리실이나 대통령 직속으로 이관하며 내무 교육 교통 체육청소년 동자부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정무1,2장관실 보훈처를 폐지 또는 축소한다는 게 골자였다. 반대로 상공부는 부총리급으로 격상, 통일과 상공 부총리의 2원체제로 한다는 것이었다.

‘중령’의 해설은 이렇다. “혁명적으로 규제를 없애면 기구는 당연히 축소됩니다. 우리는 규제개혁을 전제로 국가목표를 ‘제2의 수출드라이브’를 통한 국부(國富)창출에 두고 정부기능들이 과감하게 ‘헤쳐 모여’할 수 있도록 메스를 가했습니다.”

행정구역 개편안도 이에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주요 골자는 도(道) 군(郡) 읍면(邑面)의 3단계로 돼 있는 행정구역을 한 단계로 축소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경우에는 두가지 안이 제시됐다. 서울을 동서남북의 4개 구(區)로 분할하는 1안과 서울의 사대문(四大門)안을 중앙구로 하고 나머지 지역은 동서남북으로 나누는 2안이 그것.

‘중령’의 증언. “3,4개 또는 4,5개의 군을 하나의 생활영역으로 통합한 자치단체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 건지는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한단계로 축소하니 전국이 42∼48개의 행정단위로 이뤄지게 됐습니다. 경상도라는 이름도 없애고 전라도라는 이름도 없애야 한다는 게 동숭동팀의 결론이었습니다.”

금융자율화에 대해서도 두가지 안이 마련됐다. 첫째안은 금융기관에 대한 재벌그룹의 소유지분 한도제를 철폐, 재벌도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이었고 둘째안은 ‘금융전업그룹’안이었다.

전병민씨는 김영삼대통령당선자에게 “이건 은행들에 주인을 찾아주자는 얘깁니다”라고 보고했다. 김당선자가 평생을 ‘야당정치인’으로 살아온 점을 감안, ‘쉬운 말’로 보고했다. 부패척결도 “아무리 파리채를 들고다녀도 파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웅덩이를 메워야 합니다”라며 규제혁파가 곧 부패척결의 첫단추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총 2백36개 개혁과제를 담은 ‘동숭동 개혁안’은 수천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연인원 5백명에서 6백명 가량의 교수, 정부연구기관 및 민간연구소연구원과 공직자가 동원됐고 반년가까이 토의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김당선자에게 모두를 ‘입력’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을 얼마나 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동숭동팀은 일단 다섯시간짜리 보고서와 이를 다시 요약한 한시간짜리 보고서를 별도로 준비했다.

선거 일주일 후인 92년 12월 성탄절을 전후한 어느날. 전씨는 김당선자의 상도동 자택으로 호출을 받고 한시간짜리 요약본으로 보고한 뒤 내친 김에 대강의 개혁일정도 함께 브리핑했다.

“각하, 개혁에는 각종 입법문제가 따릅니다. 취임 전에는 시간이 촉박해 어렵습니다. 하지만 취임 후 6개월 동안 작업을 끝마치고 연말 쯤 ‘제2의 조각’을 단행, 백지에서 새로 출발하면 됩니다.”

전씨의 뇌리에는 동숭동팀과 함께 작업해온 지난 6개월이 여러 형태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김영삼대표가 민자당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직후인 5월말, 골프장에서 처음 김후보를 만나 ‘준비된 대통령’에 대해 역설하던 일, ‘변화와 개혁’을 제1의 캐치프레이즈로 해야 한다고 건의하던 일,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의 개입으로 동숭동팀이 해체될 뻔했던 일….

사실 김영삼후보가 내건 ‘변화와 개혁’은 원래 선거용 구호가 아니었다. 김후보 선거캠프에 참여했던 핵심인사의 증언. “92년 대선 당시 쟁점은 세가지로 좁혀들고 있었습니다. 통일 경제, 그리고 개혁이었습니다. 통일은 김대중(金大中)후보가, 경제는 정주영(鄭周永)후보가 이슈를 선점하고 있었습니다. 또 통일은 상대가 있는 문제고 경제는 국제환경에 따라 워낙 가변적이라 준비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개혁은 ‘준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변화와 개혁’이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개혁은 선거구호가 아니라 문민정부의 국정방향이었습니다. 동숭동 프로젝트가 ‘5년간의 국정운영 계획과 개혁방향’에 치중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간의 작업결과를 보고받은 김당선자의 첫 반응은 “개혁은 부정부패의 척결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김당선자의 머릿속에는 ‘개혁〓부패척결’이란 등식이 요지부동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 규제개혁이니, 금융자율화니, 행정구역 개편이니 하는 화두(話頭)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김대통령에게 ‘개혁〓부패척결’이란 ‘단선적(單線的) 등식’을 심어준 ‘최초 입력자’는 누구일까. 추측은 많았지만 여러 정황과 증언으로 미뤄볼 때 ‘최초 입력자’는 바로 김당선자 자신이었을 것이라는 게 김대통령을 지켜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수도권 출신 민주계 소장인사의 풀이. “동숭동팀이 ‘제도개혁’을 주장했다면 YS는 ‘사람개혁’을 생각한 셈입니다. YS로서는 이를테면 ‘정치토양의 한계’같은 게 있었습니다. 독재와 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익힌 토양이라고 할 수 있죠.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그리고 노태우(盧泰愚)정권까지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내세운 개혁구호가 부정부패 척결이었으니까요. 또 대선 때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걸 직접 경험하며 ‘개혁〓부패척결〓정경유착 혁파’라는 생각을 굳혔을 겁니다. 김대통령이 대선자금 얘기를 하면서 ‘이러다간 나라가 망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당선자는 또 대통령후보가 된 이후 여권의 각종 정보가 자신에게 집중되면서 권부(權府)내에 만연한 부패의 실상을 보고 ‘경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치 김대중차기대통령이 당선 후 한국의 외환사정을 보고받고 “정말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경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전씨의 중도하차와 함께 ‘동숭동 프로젝트’는 천덕꾸러기 비슷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동시에 ‘문민개혁’은 ‘사정개혁’으로 치달았다. 물론 동숭동팀의 ‘개혁프로젝트’는 김대통령 취임 후 여러 형태로 되살아나긴 했다.

금융개혁의 핵심인 금융전업기업군은 동숭동팀의 입안자인 박재윤(朴在潤)대통령경제수석에 의해 취임 1년 뒤인 94년 3월 다시 거론됐다. 그러나 ‘은행에 주인을 찾아준다’는 ‘동숭동 프로젝트’의 금융전업그룹안은 논란만 벌이다 유보되고 말았다.

은행감독부처인 재무부 관료들의 반대가 집요했고 취임 1년을 넘긴 김영삼정부는 이미 개혁의 ‘힘’을 상실한 다음이었다.

93년 12월 내무장관에 기용된 ‘민주계 실세’ 최형우(崔炯佑)의원이 취임초 경영마인드를 외치며 내무공무원들을 대거 기업체에 위탁연수시키려 했던 것은 바로 ‘동숭동 개혁안’의 행로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중령’의 증언. “공무원에 기업마인드를 불어넣는다는 것은 우리 동숭동팀의 주요목표였습니다. 최장관도 아마 어디서 ‘동숭동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를 듣고 아이디어로 써먹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김대통령 취임 후 ‘동숭동 개혁안’의 일부는 대부분 이런 식의 ‘반짝 아이디어’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을 뿐이다. 주돈식씨는 “많은 개혁들이 ‘가을하늘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발표된 뒤 뒤끝 없이 사라진 것이 많았다”고까지 토로했다.

취임초 사정작업이 한창이던 어느날 전씨는 한 언론사 사주의 ‘호출’을 받았다. “당신이 김영삼씨의 ‘사람잡는 개혁’을 뒤에서 전부 조종하고 있다고 하던데….”

<김창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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