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글로벌 룰’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국제 기준이랄까 세계인의 시각과 상식에 받아들여지고 통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한국 기업의 행태와 회계처리 그리고 정부의 통계에 대한 불신이 외신에 보도되면서 글로벌 룰이라는 말은 더욱 강조된다. ‘한국정부가 제 나라의 외채통계 하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운 소리도 나왔다.
문화분야 통계에는 더욱 우스운 것도 있다. 한국의 종교인 숫자를 보여주는 공식 통계는 갓난아이까지 합친 인구보다 많다. 불교 2천5백만 기독교 1천7백16만 천주교 3백48만명 등등 모두 합산하면 6천3백23만명으로 나타난다. 이는 남한 인구 4천6백26만명보다 1천7백만명가량이나 넘치는 ‘거품’ 통계인 것이다. 한국식 통계 관행에 관해 나는 일본 법무성에 몇년 전 연수갔던 한 검사로부터 들은 실감나는 얘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일본 법무성 법무종합연구소 연구관으로 있던 구라타 세지(倉田靖司)라는 당시 40대 검사(현재는 연구1부장)에 관한 얘기다.
구라타 검사는 일본 검찰이 펴내는 범죄백서의 한 대목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바로 한국과 일본의 범죄에 관한 비교통계였다. 일본의 치안이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자부하는데 어째서 한국보다 범죄발생률이 높으냐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연수 온 검사에게 이러한 의문을 제기 한지 두어달 만에 드디어 비밀을 밝혀냈다. 통계를 잡는 방식 자체가 한국과 일본간에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좀도둑이라도 신고만 하면 곧 범죄 통계에 잡히는데 반해 한국 경찰에서는 특이하게 ‘입건’ 절차를 밟아야만 비로소 통계에 오른다는 사실을.
예를 들면 이렇다. 도쿄의 한 시민이(외국인 거주자라해도 마찬가지다) 역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치자. 경찰에 신고하면 곧 그것은 일본사회의 범죄로 기록된다. 피해신고만으로 범죄통계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내에서 자전거를 잃었다고 신고하면 경찰서에서는 십중팔구 ‘입건’ 절차를 밟는 게 아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길이 없는 이른바 ‘범인 특정이 안되는’사건의 경우 거의 내사후 종결하는 것이다. 입건처리 하지 않는 게 관례인 것이다. 절도라도 액수가 아주 많거나 범인 얼굴이 확인되어 잡을 가능성이 엿보일 때만 비로소 ‘입건’하게 되고 그때야 범죄통계에 잡힌다는 얘기다. 그렇게 서울식으로 처리하게 되면 통계는 깨끗하게 되지만 문제는 남는다.
이른바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體感)치안과 ‘통계 치안’ 사이에 갭이 생기는 것이다. 시민들은 도둑이 판친다고 해도 자료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깔끔한 치안이 나타난다. 그래서 일본의 구라타 검사를 놀라게 하는 것처럼 신선한(?) 충격을 줄 수도 있기는 하다.
이런 어림잡이 통계는 대물림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 당장의 치안책임자들은 고치고 싶어도 ‘어느날 갑자기 폭증해버릴’ 범죄발생률을 책임지기 두렵다. 문제는 하나 둘이 아니다. 예컨대 경찰청이 국회에 경찰력 보강을 위한 예산증액을 요청한다고 하면 국회의원들은 “일본보다 나은 치안에 무슨 사람타령이냐”고 통계를 들먹이면 어쩔 것인가. 자업자득이 되고 말 것이다. 통계의 허구에 관한 숱한 얘깃거리를 들먹일 필요조차 없다. 데이터는 언제나 고지식하고 정확하게 작성되어야 비로소 분석과 대책의 밑바탕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노동관계 데이터나 실업통계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다. 그 믿을 수 없는 데이터 위에서 이루어지는 대책과 정책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한국 기업회계의 고질적인 분식이나, 종교인구를 비롯한 거품 통계도 거품시대가 낳은 한 단면일 것이다. 이제 거품이 악의 상징이 되고 고통의 원천으로 드러난 이상, 정치(精緻)한 통계, 있는 대로의 실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글로벌 룰은 작은 데이터의 정직성에서부터 비롯하는 것이리라.
김충식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