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가 80년대 말부터 공부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맥아더사령부의 일본재벌 해체에 대한 연구’였다고 한다. 일본 대기업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됐다는 미 군정의 재벌정책을 한국의 재벌개혁에도 참고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박총재는 황량한 모래벌판에서 시작한 포항제철을 세계 2위의 종합제철소로 만들기까지 25년동안 ‘철(鐵)에 미쳐서’ 살아온 전문경영인.
기업을 키우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재벌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알게 됐고 누구보다 재벌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껴왔다. 따라서 이번에 박총재가 재벌에 대해 하는 ‘충고’는 그만큼 무게가 실릴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 측근은 “박총재가 하는 얘기는 재벌들에 대한 신정부 정책의 ‘마지노선’이라는 느낌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총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재벌들의 선단식(船團式)경영과 차입금의존, 경영권세습 등을 고치지 않고서는 나라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이번 재벌총수들과의 연쇄접촉에서 박총재는 이같은 자신의 재벌개혁 철학을 분명하게 밝힐 것으로 보인다. 박총재는 이미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금년내에 스스로 결합재무제표를 만들어 자율적인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며 사실상 재벌해체를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놓았다.
아울러 박총재는 차제에 기업들의 업종전문화를 촉구하면서 대기업간의 자율통폐합, 즉 ‘빅 딜’에 대한 의사타진도 시도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재벌 상호간에 섣불리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박총재가 거중조정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한편으로 박총재는 재벌들의 ‘냉가슴’도 풀어줄 계획이다. 재벌에 대해 요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애로사항도 충분히 들어 이를 신정부의 경제정책에 적극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9일 박총재가 전경련 부회장을 불러 경제계의 자구노력을 미리 듣고 12, 13일 삼성과 현대 본사를 직접 방문하는 형식으로 면담일정을 잡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철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