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⑦]장관들 「대통령면담」 하늘의 별따기

  • 입력 1998년 1월 18일 20시 26분


96년12월 어느날. 안경사협회 로비사건으로 해임된 이성호(李聖浩)보건복지부장관의 후임으로 발탁된 손학규(孫鶴圭)장관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안병영(安秉永)교육부장관을 만났다. 아무래도 한약조제시험 무효화를 주장하며 끝까지 복학을 미루고 있는 한의대생들 문제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교육부와 대학측의 구제조치로 대부분은 복학한 상태였지만 아직도 1백여명 이상이 ‘미구제’로 남아 있었다. 새학기가 되면 다시 쟁점으로 부상, 한약사분쟁으로 확대될 조짐도 없지 않았다. 손장관〓내 소관업무도 아닌데 참견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의대생들을 복학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장관〓(답답한 표정으로) 그 문제는 나에게 맡겨주시오. 손장관은 그러나 대화 도중 문제가 김영삼(金泳三)대통령한테 걸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육부의 연이은 구제조치가 정부의 원칙없는 양보로 비치자 김대통령은 “기강이 없어진다”고 꾸짖었다. 교육부는 이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담신청에 “급한 일이냐”손장관은 안장관과 헤어진 후 청와대에 대통령면담을 신청했다. 의전수석실에서는 “급한 일이냐”고 물은 뒤 바로 면담일정을 잡아줬다. 김대통령을 설득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낸 손장관은 이수성(李壽成)총리를 찾아갔다. “제가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긴 했지만 안장관에게 직접 그 얘기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안장관의 체면도 있지 않습니까. 총리께서 안장관에게 ‘대통령의 결심은 내가 책임지겠으니 학생들을 복학시키자’고 해주십시오.” 손장관은 그해 11월13일 취임, 이듬해인 97년8월5일 장관직을 물러나기까지 대통령을 모두 네번 만났다. 세번은 그가 직접 대통령 면담신청을 해 이뤄졌고 한번은 보건복지부 담당인 청와대사회문화수석실에서 마련한 보고자리였다. 9개월 조금 넘게 재임하면서 대통령을 네번이나 만나 직접 업무를 협의한 셈이다. 손장관은 그러나 ‘극히 희귀한 경우’였다. 대부분의 장관들은 1년에 한번 대통령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김대통령 취임 이전 이른바 ‘문민개혁의 산실(産室)’로 알려진 ‘동숭동팀’의 멤버로 일하다 취임후 2년간 청와대정무수석실 비서관으로 있었던 김충남(金忠男)전외교안보연구원 교수의 진단. “국무총리 당대표 안기부장은 매주 1회, 경제부총리 통일부총리 감사원장은 대략 2주에 1회 정도 정기적으로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타 장관들은 보고조차 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반면 김대통령의 외국방문기간을 제외하면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수석비서관 회의는 매주 금요일 정기적으로 개최됐습니다. 김대통령은 장관들과 일했다기보다는 비서관들과 일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김박사는 ‘인상이 짙다’고 했지만 최근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개정하면서 실증적인 자료를 내놨다.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은 김박사가 14대 대선 직전인 92년6월에 펴낸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물. 역대 미국대통령들의 참모조직, 백악관 비서실 운영모델, 대통령 취임 준비, 내각관리 및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등 전직대통령들의 리더십을 분석한 책이었다. 청와대를 떠나 하와이대 동서문제센터(East―West Center)로 자리를 옮긴 김박사는 현지에서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을 다시 쓰면서 역대 대통령에 김영삼대통령을 포함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김박사가 개정판에 담은 ‘김영삼대통령 일정계획 분석(94∼95년)’이라는 데이터. 각 수석비서관실에 전달되는 대통령의 일정계획표를 기초로 작성된 이 표는 김대통령이 94,95년 2년간 주재한 회의,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의 보고 청취, 리셉션 및 오찬 만찬, 각종 행사 참석, 기자회견 횟수를 취합해 정리한 일종의 ‘대통령 근무분석표’다. 김박사의 분석표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이 기간 국무회의 신경제회의 농어촌대책회의 경제장관회의처럼 관계장관들이 참석하는 각종 국정회의는 한해 2∼3회에 그친 반면 수석비서관회의는 94년 30회, 95년에는 37회나 주재했다. 개각30회장관118명배출2∼3회 정도 주재한 각종 관계장관회의도 극히 형식적인 회의에 그쳤다. 김박사의 증언. “매년 2∼3차례 열렸던 국무회의도 신년초의 의례적인 회의거나 대통령 정상외교 설명을 위한 것이었다. 신경제회의 등은 대규모 회의여서 대통령과 장관들이 현안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하기 어려웠다. 김대통령이 주재한 장관회의는 몇차례 경제장관회의가 있었을 뿐 기타 장관회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각료들의 보고청취 횟수를 살펴보면 사정은 더욱 명확해진다. 김대통령은 94,95년 2년간 총리로부터 68회, 경제부총리로부터 37회, 통일부총리로부터 39회의 보고를 받았지만 기타 장관보고는 94년 6회, 95년 4회에 불과했다. 총리와 부총리를 제외한 장관이 21명이니까 대부분의 장관들은 대통령과 업무협의 한번 못해보고 한 해를 보낸 셈이다. 김대통령은 더구나 취임 이후 30여차례의 크고 작은 개각을 단행, 모두 1백18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장관 평균 재임기간은 13.3개월. 그러나 유일하게 김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한 오인환(吳隣煥)공보처장관을 빼면 나머지 장관들의 평균임기는 11.3개월로 1년이 채 못된다. 취임초의 박희태(朴熺太)법무 박양실(朴孃實)보사 허재영(許在榮)건설부장관처럼 ‘조각(組閣)검증파동’에 휘말려 ‘열흘 장관’으로 끝낸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20일짜리 장관, 25일짜리 장관도 있었다. 이렇듯 단명(短命)으로 점철한 ‘문민장관사(史)’를 되돌아보면 임명장 수여식때만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경질된 장관들도 허다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면 행사참석횟수를 보면 2년간 기념식 및 대회참석이 50회, 외국손님접견이 무려 1백19회에 이른다. 전직 청와대비서관의 비판. “김대통령은 외국인사들을 접견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김대통령이 만난 인사 중에는 부르키나파소 부탄 에리트레아 외무장관 등 이름없는 나라의 장관들을 위시하여 전직장관까지 비중이 떨어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왜 그처럼 각료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김대통령이 국정운영을 ‘비선중심’ ‘비서 중심’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마디로 차남인 현철(賢哲)씨와 청와대수석비서관들이 장관자리를 메우고 있었다는 풀이다. 여기에 장관들의 보신주의(保身主義)도 가세했다는 분석이다. 김영삼정부 초기 의전수석비서관을 지내고 현재 통일원차관으로 있는 김석우(金錫友)차관의 시각. “아마도 취임초부터 터지기 시작한 구포열차참사, 서해훼리호사고, 아시아나항공기 추락사고 등 각종 대형사고 때문에 한순간도 편치 않았던 청와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대통령이 편치 않으니까 장관들도 스스로 대통령면담을 신청, 업무를 협의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장관들은 자신들의 인사문제는 현철씨에게, 업무는 청와대수석들에게 ‘위탁’하다시피 한것이 김영삼정부의 모습이었다. 손학규의원의 경험담. “취임후 새해가 돼 업무보고를 받으려고 국장 과장들을 찾았더니 모두 자리에 없다는 겁니다. 자꾸 자리에 없다고 해 알아보니 청와대 수석실에 보고하러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신년 업무보고를 안받으니 수석실에서, 그것도 수석비서관도 아닌 일반비서관이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보건복지부도 약정국 보건정책국 하는 식으로 각 부서가 돌아가며 비서관에게 보고를 하느라 장관이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찾는데도 자리에 없었던 겁니다. 당장 중단시키고 주의를 주려고 했더니 간부들이 ‘그냥 놔두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이후 내가 대통령한테 업무보고를 할 때는 담당 수석비서관의 배석을 일절 배제했습니다.” 96년8월 해양수산부 신설과 함께 초대장관으로 취임한 신상우(辛相佑)의원은 업무보고차 청와대를 방문할 때 아예 차관은 물론 1급 간부들까지 대동했다. 담당 수석비서관은 물론 경호실까지 당황했지만 신장관은 “이 사람들이 내가 대통령한테 어떤 보고를 하는지 알아야 부처운영이 됩니다”라고 고집했다. 김대통령도 웃으면서 “이제까지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사실만 알아두라”며 흔쾌히 ‘양해’했다. 신장관만 해도 국회의원 7선 경력의 민주계 중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대부분의 장관들에겐 ‘꿈같은 얘기’였다. 〈김창혁기자〉 지금까지 주 2회(월,목요일) 게재해온 ‘비화 문민정부’ 시리즈를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따라 이번주부터 주 3회(월,수,금요일)로 늘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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