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가슴에 납덩이를 안고 살아온 기분인데 이렇게 훌훌 털어 놓고보니 정말 후련합니다. 이젠 내일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납치된 김대중(金大中)’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넜던 용금호 선원들은 19일 동아일보를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 전말이 밝혀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당시 용금호 선원 21명중 출항목적이 ‘김대중 납치’임을 알고 있었던 선원은 통신장 정용석(鄭容碩·50·부산 서구남부민동)씨 등 4명.
정씨는 당시 공작목표가 ‘납치’였음을 지금도 확신한다.
출항전날 정사장이라 불리던 중정요원(정운길)이 항구근처 다방에서 이희호(李姬鎬)여사에게 전화를 걸고 오더니 다른 요원(박정렬)에게 “부인(이희호여사)이 울더라. 울게 뭐 있노. 영감 데려오는데…”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중정이 김씨를 암살할 계획이었다면 이런 전화를 걸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73년 8월8일 오후1시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된 김대중이 오사카에 정박중이던 용금호에 승선한 것은 9일 오전1시경.
“눈에 안대가 덮인 채 검은 보자기에 싸인 김씨를 로프로 선창에 끌어올렸습니다. 선창밑 타기실(舵機室)에 감금하고 자해하지 못하도록 붕대를 감은 막대기를 입에 물렸지만 그의 담담한 모습에 자해의사가 없다고 판단, 막대기를 뺐죠.”
용금호 엔진운항을 담당했던 조기장 김광식(金光植·59·부산해운대구 우동)씨의 증언이다.
그는 “김대중씨가 ‘나를 죽일 것이냐’고 묻기에 ‘죽일 생각이 없다’고 말해주자 김씨가 아무말 없이 누워 오른쪽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위에 여러차례 성호를 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양측 증언은 김대중씨가 “비행기소리를 들었다”는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정용석씨는 이를 “이튿날 타기실에 감금돼있던 김씨를 옆방 2번 화물창에 감금했는데 바로 옆에 엔진룸이 있어 엔진소리를 비행기 소리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양 팔과 다리를 모두 묶여 누워 있었고 눈까지 가려진 상태라 정상적인 감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는 것.
당시 갑판원 임익춘(林益春·65·전남 여수시 둔덕동)씨 역시 “항해중 비행기나 헬기를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선원들은 또 “납치사건이후 윤진원(尹鎭遠)공작단장이 선장 이순주(李淳柱)씨를 목포―제주간 여객선 선장으로 취직시켜주는 등 선원들이 비밀을 지키도록 ‘사후 관리’해왔다”고 전했다.
특히 윤씨는 80년 ‘서울의 봄’시절 부산에 내려와 선원들과 술자리를 갖고 수백만원씩을 쥐어주면서 “세상이 바뀌어 더이상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다. 수백억원의 재산을 가진 이후락(李厚洛)씨가 당신들을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선원들은 증언했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