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 8월9일 하비브 당시 주한미대사가 일본으로부터 김대중씨가 납치됐다는 첫 연락을 받았다. 아마 일본경찰이 연락해주지 않았나 싶다.
하비브대사는 곧바로 나에게 전화를 해 이 사실을 알리면서 “우리는 누가 김씨를 납치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가 청와대에 가서 ‘김씨가 한국중앙정보부(KCIA)에 의해 납치됐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하루 안에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다음날 하비브를 찾아가 “맞습니다.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씨를 납치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비브는 곧 청와대로 달려가 박정희대통령에게 “한국중앙정보부가 김대중씨를 납치했으므로 지금 당장 중정에 연락해 그를 풀어주라”고 요청했다.
박대통령은 충분히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대중을 풀어주도록 지시했고 이 지시는 곧장 대한해협에서 김대중을 싣고 오던 선박에 전해졌다.
수장될 운명에 처했던 김씨는 이 지시가 떨어지면서 몸의 결박이 풀렸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주어졌으며 13일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박대통령이 김대중 납치를 지시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비브가 자신을 만나러 왔을 때 직감적으로 이후락(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뭔가 미친(Crazy)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이보다 앞선 어느 날 박대통령은 이부장과 소주를 마시면서 김씨가 해외에서유신반대운동을 하고 있는데 대해 분노를 표시한 적이 있다.
박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에서 보여준 김씨의 행적이 사대주의라고 심하게 비판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부장은 김씨를 제거하면 박대통령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일각에서는 당시 김씨를 싣고 오던 배 위에 미국정부가 보낸 헬기가 떠 그의 죽음을 막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차기대통령도 나에게 이에 대해 직접 물은 적이 있지만 미국은 어떤 비행기도 현장에 보내지 않았다.
연락체계 유지가 필요했던 KCIA나 납치사건으로 화가 나 있던 일본경찰이 추적하기 위해 비행기를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나 어느 경우도 확실치 않다.
우리는 김씨 구명을 놓고 당시 일본정부와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김씨를 구해야 하고 청와대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판단이었다.
김씨 납치사건 이후 한미관계는 곧 원상으로 돌아갔고 특히 이후락씨가 물러나고 신직수(申稙秀)씨가 새로 중앙정보부장이 되면서 미CIA와 KCIA의 관계도 크게 호전했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