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의 김대중(金大中)씨 납치 목적은 살해였나, 강제귀국이었나. 이 문제는 사건 발생 25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주장도 판이하게 엇갈린다. 피해자 김씨는 줄곧 “73년 여름 나에게 일어났던 일은 엄밀히 말하자면 납치사건이 아니라 살인미수사건이었다”고 말해왔다. 사건 당시 미국중앙정보국(CIA)한국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 전주한미국대사는 “김씨가 수장될 운명에 있었다”고 말해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가해자인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용금호 선원들의 말은 다르다. “살해 의도는 없었으며 순수한 납치였다”고 반박한다. 하나의 진실을 둘러싸고 양측이 정반대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중정이 살해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김씨의 논거(論據)는 크게 두가지다. 당시의 사건 정황과 사건후 이후락(李厚洛)전중앙정보부장이 동향 친구인 평민당 최영근(崔泳謹)전의원에게 털어놨다는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의 지시내용이다.
먼저 김씨는 납치사건 과정에서 자신이 두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해왔다. 한번은 납치된 직후 끌려간 도쿄(東京)팔레스호텔 2210호에서였다. 김씨에 따르면 범인들은 호텔방에서 자신을 살해한 뒤 욕실에서 시체를 토막내 배낭에 담아 호텔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전송하러 나온 통일당 김경인(金敬仁)의원이 현장을 목격하는 바람에 첫번째 살해기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 범행에 실패하자 범인들은 자신을 용금호로 끌고가 몸에 추를 달고 결박해 수장하려다 미국측의 압력으로 살해계획을 포기했다는 주장이다.
김씨는 또 “수장 직전 비행기 나는 소리가 들렸고 범인들이 놀라 갑판위로 뛰어 올라가 ‘비행기다’하고 소리쳤다”고 회상하고 있다.
김씨가 중정의 살해의도를 확신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최영근씨를 통해 들었다는 이씨의 발언내용이다. 김씨는 87년 10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최씨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박정희씨가 이후락씨 보고 ‘김대중이 해치워 버려’, 이건 이후락씨 말 그대로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자기는 속으로 깜짝 놀라 충격을 받아가지고 그냥 ‘알았습니다’하고 물러나와 어물어물 한 달을 보냈다는 거예요. 그후 (박정희씨가)다시 불러가지고 ‘왜 하라는데 안하느냐’고 다그쳤다는 거예요.”
김씨는 자신의 체험과 최씨를 통해 들은 이후락씨의 발언내용을 중정의 살해기도 근거로 확신하고 있다.
그레그 전대사의 발언도 김씨의 확신을 굳히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레그 전대사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납치사건을 중정의 소행으로 판단한 당시 하비브대사는 박정희대통령을 만나 김씨를 풀어주도록 요청했다. 배 안에서 몸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채 수장될 운명에 처했던 김대중씨는 이 지시로 결박이 풀리고 비로소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주어졌다”고 회고했다.
이같은 주장을 종합하면 중정은 당시 김대중씨에 대한 살해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중정관계자들과 용금호 선원들의 증언은 다르다. 이후락씨는 87년 역시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호텔에서 납치하는 계획 자체지, 절대로 살해하려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호텔에서 어떻게 토막살인을 하고, 비행기가 떠서 수장을 면했다면 그 비행기가 배의 항진을 내버려 뒀겠느냐”고 반문했다. 비행기가 뜬 사실조차 없다는 것. 당시 정보차장보였던 이철희(李哲熙)씨도 같은 주장이다. 이씨는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납치지시를 내릴 때 이후락부장은 ‘김씨를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며 “애초부터 암살할 계획은 없었다”고 살해의도를 극구 부인했다.
용금호 선원들도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다. 정용석(鄭容碩)씨는 “살해의도는 없었으며 비행기가 뜬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죽일 의사가 없음을 김씨에게 알려주지 않아 김씨 본인은 ‘혹시 죽는 것 아니냐’며 상당히 초조해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김광식(金光植)씨는 “김대중씨가 ‘나를 죽일 것이냐’고 물어 ‘죽일 생각이 없다’고 말해주자 아무말 않고 누워 오른쪽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위에 여러차례 성호를 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물론 중정직원들이나 용금호 선원들이 자신들의 범죄정도를 감경하기 위해 입을 맞춰 거짓말을 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본보가 입수한 ‘KT사건 행동별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9개의 공작조가 도쿄에서 서울까지 치밀하게 역할분담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이 “처음부터 납치 의도였다”는 중정측 인사들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이 일람표가 사전계획서가 아닌 사후보고용이었다는 점 때문에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중정이 김씨를 죽일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논쟁은 사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70년대 후반부터 20여년간 끝없이 이어졌다. 납치사건에 관련한 당시 중정관계자들의 양심적인 증언과 베일속에 묻혀있는 자료의 공개가 이뤄져야만 그 진실이 파악될 것이다. 의문이 풀리기에는 지난 20여년이 아직은 짧은 세월인지도 모른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