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공백/각부처 표정]금융-물가대책 결재판「낮잠」

  • 입력 1998년 2월 26일 19시 27분


▼ 총리실 ▼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의 국회 임명동의안 처리를 둘러싸고 정국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26일 총리실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날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혜화동 자택으로 이사까지 마쳤던 고건(高建)총리는 26일 아침 심우영(沈宇永)총무처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국정공백방지를 위한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하도록 지시했다.

총리인준 문제로 새 정부조직법 공포와 각료임명이 지연돼 국정공백과 혼란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행정공백 대처방안과 정부조직법 공포문제 등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총리는 25일 오전까지만 해도 26일 중 이임식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총리인준 문제가 불투명해지자 일단 이임식을 취소하고 26일에는 세종로청사로 출근하지 않고 자택에 머무르며 정부조직법 공포와 관련한 부서(副署) 등에 대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25일 밤부터 정국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고총리는 국정공백방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발벗고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고총리는 비상장관회의에서 “공직사회가 동요하지 말고 행정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모두 출근한 뒤 자리를 지키라”고 지시한 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정부에 최대한 협조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고총리는 회의가 끝난 뒤에는 하루종일 집무실에서 일상적인 업무를 보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냈다. 정치권의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27일에도 정상출근해 집무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총리실 소속 공무원들은 새 정부조직법이 공포될 경우 공보처와 정무1장관실에서 전입해올 직원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될지 등에 대한 지침이 없어 당혹해하면서 거의 일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양기대·공종식기자〉

▼ 경제부처 ▼

과천 경제부처는 개점 휴업중이다.

“A국장, 장관 비서실인데 결재받을 것 없습니까. 장관님이 오늘 정상근무를 합니다.”

“글쎄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사안이 생기면 연락드리죠.”

26일 국무총리 인준이 지연되면서 과천정부종합청사 재정경제원에서 벌어진 촌극이다.

A국장은 실제로 결재받을 사안이 몇개 있지만 새 장관이 올 때까지 미루고 있다. 물러날 장관한테 결재를 받아 놓으면 새 장관이 온뒤 다시 설명을 해야 하니 번거롭기만 할 뿐이다.

14개 금융개혁법 시행령안, 물가대책, 수출기업 자금지원문제 등 시급한 현안들의 처리가 이렇게 새 장관의 결재를 기다리며 지연되고 있다.

25일 보따리를 싸던 임창열(林昌烈)부총리가 26일 정상 출근, 업무를 독려하고 있으나 이미 영(令)이 서지 않는 분위기.

재경원은 현판까지 하루전에 재정경제부로 갈아붙였다. 재경부 기획예산위원회 예산청 금융감독위원회로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직원들은 마음이 벌써 콩밭에 가 있다.

하위 직원들은 일손을 놓고 있지만 임부총리는 일정을 빠듯하게 잡아놓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25일 밤 11시 반까지 근무했고 26일도 아침부터 한가할 틈이 없다. 오후엔 긴급 경제장관 간담회까지 개최했다. 그러나 이날 경제장관 간담회는 행정공백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의식해 ‘기존 장관들이 아직도 국정을 챙기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외에 실질적 정책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부처도 상황은 마찬가지.

통상산업부도 이미 산업자원부로 현판을 바꿔 달았지만 정부조직개편 공포가 늦어지는 바람에 새 현판을 볼썽사납게 비닐로 덮어놓고 있다.

외교통상부로 37명, 중소기업청으로 29명이 자리를 옮기고 61명이 감축될 예정이지만 조각 지연으로 인사가 늦어져 뒤숭숭한 분위기.

정해주 장관과 한덕수(韓悳洙)차관 등은 사무실을 지켰으나 하위 직원들은 친한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무슨 말이 없느냐”고 인사 관련 정보를 수소문하느라 분주하다.

결재를 받아야 할 업무도 “지금 받아본들 어차피 부도수표가 되는 것 아니냐”며 한쪽으로 미뤄놓는다.

정보통신부는 강봉균(康奉均)장관이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장관자리가 공석중이어서 박성득(朴成得)차관이 직무를 대행하고 있다.

초고속망 조기구축 방안, 벤처기업 활성화대책, 전자상거래 관련 법안 마련 등 현안들이 많지만 새 장관이 임명될 때까지는 아무도 움직일 기색이 아니다.

직원들은 일손이 잡히지 않는 듯 ‘누가 장관으로 오느냐’ ‘후속인사는 어떻게 되느냐’를 점치며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는 모습.

해양수산부는 어촌개발국이 폐지되고 5개과가 분산되면서 52명이 축소되는 데 따른 인사가 늦어져 어수선한 모습이다.

농림부는 감축인원이 40명으로 다른 부처에 비해 적어 별 동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위 직원들은 복도에 모여 새 대통령이 취임했는데도 총리 인준이 늦어져 행정공백 현상이 생긴 것을 놓고 공공연하게 정치권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임규진·이 진·박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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