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3·3조각’이후 김중권(金重權)비서실장 주재로 세차례나 수석비서관회의를 갖고 차관인선을 협의했다. 존안자료를 관리하는 박주선(朴柱宣)법무비서관도 참석했다.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각종 자료와 수석비서관들의 의견을 토대로 차관급후보를 2,3배로 압축했다. 김대통령은 내부승진 원칙을 정했고 이는 장관과의 조화를 위한 것이었다.
인선절차의 첫단계는 전문성과 실무능력에 대한 검토였다. 다음 단계는 품위검증. 사생활과 재산관계 등에 초점을 맞췄으나 대상자들이 모두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큰 흠은 없었다.
마지막 단계는 조직내 신망 점검과 지역별 안배였다. 조직내 신망은 수석비서관실별로 은밀히 체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지역별 뿐만 아니라 출신대학별 안배까지도 신경을 썼다.
안배 원칙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 대표적인 자리는 역대 정부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국세청장이었다.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지낸 김거인(金居仁)한국증권금융사장이 끝까지 경합했으나 김사장이 김대통령의 먼 친척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했다는 후문.
금융감독위부위원장 인선은 또다른 케이스. 윤원배(尹源培)숙명여대교수의 개혁성향을 산 것이지만 최근 은행의 주총결과 선출직에 호남출신 인사가 거의 없어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호남출신을 임명해야 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심을 끌었던 경찰청장 인사도 ‘지역안배’ 때문에 김대통령이 고심했다고. 경찰인사위원회의 의견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김세옥(金世鈺)경찰대학장이 적임이라고 판단했으나 검찰총장이나 경찰청장에 모두 ‘호남출신’을 앉힌다는 점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태정(金泰政)검찰총장은 김영삼(金泳三)정부가 임명했고 법으로 임기를 보장하고 있는 만큼 새 정부에서 발탁한 것으로 볼 수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전언이다.
청와대는 복수인선안을 마련한 뒤 신임장관과 김종필(金鍾泌)총리서리의 의견을 들어 인선안을 단수로 압축했다. 그 과정에서 신임장관들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장관급과 차관급 사이인 외교통상부의 통상교섭본부장은 구 외무부와 통상산업부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으나 박정수(朴定洙)장관이 통합부처의 인화 차원에서 통상산업부의 소외감을 달래기 위해 한덕수(韓悳洙)통산부차관을 강력히 천거했다는 얘기가 무성하다.
장관들 중에는 업무의 연속성을 고려, 차관의 유임을 바라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요구는 별로 반영되지 않았다.
공무원 사기진작 차원에서 전 부의 차관을 경질했다. 청와대사회복지수석 인선에서 아깝게 탈락, 행정자치부차관 기용이 유력시됐던 이근식(李根植)차관이 결국 탈락한 것도 같은 이유라는 분석이다.
다만 조건호(趙健鎬)총리비서실장은 김총리서리가 처음부터 유임을 희망했다. 엄낙용(嚴洛鎔)관세청장 강정훈(姜晸薰)조달청장 이보식(李輔植)산림청장 추준석(秋俊錫)중소기업청장 등 유임된 외청장 4명은 주로 임명된지 얼마 안됐다는 점이 고려됐다.
김실장이 최종인선안을 들고 청와대 대통령관저로 올라간 것은 7일 오후3시. 김대통령은 김실장이 올린 안을 거의 그대로 재가했다. 김실장은 그러나 김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뒤에도 박비서관을 시켜 재산관계를 중심으로 한번 더 점검하도록 했다.
청와대 박지원(朴智元)공보수석이 발표명단을 김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은 8일 아침이었다.
그러나 안기부차장 인선에는 김대통령의 확고한 뜻이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신임이 두터운 신건(辛建)전법무부차관과 나종일(羅鍾一)경희대교수를 각각 1,2차장으로 임명한 것은 안기부에 대한 강력한 개혁의지를 보인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이번 차관급 인사에서 현역의원은 한 명도 기용하지 않았다. 정치인 배제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비상기획위원장에 김진선(金鎭渲)전2군사령관을 기용한 것은 대선 직전 자민련에 입당, 김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데 대한 논공행상의 성격이 짙다.
〈임채청·공종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