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해외공작원 정보보고’에 따르면 흑금성은 지난해 8월22일 모란봉 지역 한 초대소에서 김정일(金正日)을 35분간 단독 면담한 것으로 돼 있다. 만일 사실이라면 박씨는 북한으로부터 최고 수준의 신뢰를 받은 공작원이었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된다. 94년 8월 김일성(金日成) 사망 이후 북한을 다스려온 김정일은 자신을 베일 속에 가려둔 채 좀처럼 외부인을 접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밀사도 아닌 안기부의 일개 공작원이 과연 김정일을 만날 수 있었겠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상식적으로 볼 때 북한의 최고통치자가 한국의 ‘스파이’를 단독으로 만나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박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며 긍정도 부정도 피하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그가 지난해 8월19일부터 30일까지 회사관계자들과 광고제작문제 협의를 위해 입북했던 점에 비춰보면 북풍문건에 기록된 김정일 면담이 사실일 개연성은 남아 있다.
아무튼 박씨를 잘 아는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박씨가 북한내 고위층과 상당한 교분을 쌓고 있었던 것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부에 따르면 박씨는 96년 9월 유효기간이 1년인 북한주민접촉신청을 처음 받았으며 지난해 이를 1년간 연장한 것으로 돼 있다. 박씨는 이 기간중 수십차례에 걸쳐 북한측과 접촉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박씨가 통일부에 제출한 북한주민접촉보고서에는 사업목적의 접촉사실만이 간략히 기록돼 있다는 게 당국자의 설명이다. 그가 대북사업가로 위장한 공작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긍이 가는 얘기다. 박씨가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북한을 오가며 남북 양측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풍문건도 박씨가 지난해 6월10일 평양 고려호텔 안가에서 보위부 대남공작책으로부터 대선후보 중 이회창(李會昌) 김대중(金大中)의 선거운동조직에 침투할 준비를 하고 이인제(李仁濟)전경기지사측과도 친교를 맺어두라는 지시를 받은 점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박씨는 19일 새벽에 만난 한 인사에게 “모든 자료를 갖고 있으며 때가 되면 다 밝히겠다”고 말했으나 다른 인사에게는 “이번 일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열어서 좋을 게 없으므로 나 혼자 죽겠다”고 말하는 등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또 지난해 중국에서 북한의 안병수(安炳洙)조평통위원장대리와 접촉한 정재문(鄭在文)의원 문제에 대해 “공식 루트가 있는데 그가 왜 베이징에 왔겠느냐”며 구여권책임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라고 얘기했다고 한 인사가 전했다.
〈한기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