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구칼럼]숫자가 지배하는 정치

  • 입력 1998년 4월 24일 19시 47분


여권이 드디어 거야(巨野) 무너뜨리기 공략에 나선 모양이다. 한나라당에서 11명만 여당으로 옮기면 원내 과반의석은 무너진다. 명분은 안정적 국정운영이다. 거대야당이 다수를 무기삼아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는 소신껏 국정을 펴나가기가 불가능한 이상 정계개편을 통한 현상타파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으니 여론에 좀 두들겨 맞는 한이 있더라도 개의치 않고 강행하겠다는 결심인 듯하다.

▼ 결국 정치수준의 문제 ▼

결론적으로 칼자루 쥔 쪽에서 작심하고 덤벼든다면 결국 정계개편은 되는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과거의 예로 봐도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몇차례 있었으나 그런 구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90년의 3당통합이 그렇고 96년 4·11총선 직후 김영삼(金泳三)정권의 야당의원 빼가기에 의한 인위적 정계개편이 그렇다.

누가 봐도 볼썽사나운 오늘의 이 사태진전은 한나라당이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일단 대선에 진 이상 새 정권 출범 때는 대국적으로 도와줬어야 옳다. 그런 다음 하는 일을 보아가며 공격에 나설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발목잡는다’는 인상을 준 것은 큰 잘못이다.

그렇다고 언필칭 ‘국민의 정부’를 자임하는 현정권까지 과거의 전례를 답습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선택인지는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거대야당으로서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주제파악조차 제대로 못하는 한나라당도 한심하지만 2년전의 의원빼가기를 그대로 반복하겠다는 여권에 박수를 보낼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다수의 자만도 승리자의 오만도 둘 다 마음에 안든다.

여소야대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대통령제를 하는 미국도 대통령은 민주당소속, 국회는 공화당이 다수지배를 하고 있지만 잘 굴러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난리인가. 바로 여기에 우리 정치의 문제점이 있다. 결국 정치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정치는 돈벌기 위한 영업행위가 아니다. 국익과 상식을 앞세워, 견제와 균형 속에,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선진 민주적 정치풍토가 정착돼 있다면 숫자가 무슨 큰 문제이겠는가. 그게 안되고 있으니 물리적 숫자가 정치의 중요한 결정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믿을 것은 숫자뿐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현실정치에서 숫자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논리는 뒷전이고 오로지 숫자만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면 정치판은 각박해진다. 국회의원이라면 명색이 이상과 포부를 가진 국민대표들인데 바둑판의 돌이나 장기판의 졸 쯤으로 대접받는다면 슬픈 일이다. 새 집권세력이 숫자에 연연하는 것이 행여 밀어붙이기 국정운영을 위한 포석이라면 정국은 가파르고 고달파진다. 자유당시절의 부산정치파동, 제3공화국의 3선개헌, 문민국회때의 기자석 공중날치기 사회에 이르기까지 변칙과 밀어붙이기는 수없이 보아온 터다.

정계개편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법에 금지된 것도 아닌 이상 그럴만한 요인이 생기면 할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정치적 이념과 노선, 정책과 철학을 중심으로 한 재편이 아니라 저차원의 숫자놀음이고 숫자싸움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한쪽에서는 개혁도 정국안정도 상대방 정치철새들을 불러들여 일을 도모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벌에 쏘인 것처럼 반발하며 그 철새라도 붙잡아 주도권을 지키려고 사생결단을 한다. 이 시기 이 판국에 한국정치 구도개편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한줌밖에 안되는 10여명의 정치철새들이라는 사실은 우리 정치의 희극이자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국정-민생 걱정스러워 ▼

지금으로서는 말린다고 그만둘 여권도, 호소한다고 반성할 야당도 아닌 것같다. 어느쪽으로든 가부간 결판이 날 때까지 얼마나 시끄러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통에 산적한 국정과 민생은 어쩔 것이며 IMF위기극복은 또 어찌 될 것인지 그것이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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