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이상 선거를 지켜봐왔지만 이런 선거는 처음 본다.”
나아지기는 커녕 그 어떤 선거보다 흑색선전과 지역주의가 극성을 부린 선거행태를 두고 내뱉은 탄식이었다.
사실 이번 선거에서 상대후보의 ‘사생활 뒤지기’는 마치 유행병같았다. TV토론이 저질 흑색선전과 인신비방의 무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지적까지 대두됐다.
특히 지역감정 조장행위는 어느 당, 어느 후보, 어느 지역에 관계없이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아니 창궐(猖獗)했다.
“1천4백년만에 ‘호남대통령’을 만들어낸 저력을 바탕으로 전남이 개혁전진기지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허경만·許京萬전남지사후보)
“국민회의가 전라도당, 자민련이 충청도당이라면 한나라당은 누가 뭐래도 경상도당 아닙니까.”(권오을·權五乙한나라당의원)
“충청권이 똘똘 뭉쳐 시도지사에서 시도의원까지 100% 당선시켜줘야 합니다.”(김용환·金龍煥자민련부총재)
“충청도 강원군이란 말을 들어봤느냐. 강원도가 언제부터 충청도당 경상도당의 부속물이 됐느냐.”(무소속 이상룡·李相龍강원지사후보)
연세대 허영(許營)교수는 이런 선거를 한마디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기 위해 국력을 낭비한 선거로 헌정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정리했다.
“이번 선거는 지역볼모정치의 극치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헌법이나 정당법이 왜 정당설립의 조건으로 5개 이상의 광역자치단체에 지구당을 두도록 했겠습니까. 소지역정당을 막고 정치가 국민통합에 기여하도록 하자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연합공천이란 노골적으로 특정지역을 지지기반으로 삼겠다는 전략입니다. 또 중앙과 지방이 한덩어리가 돼 현재의 정치구조를 깨느냐 마느냐 하는 사활(死活)을 건 정치싸움으로 몰아간 게 그런 현상을 더 부추겼습니다. 이번 선거는 누가 이기든, 누가 지든 승자도 패자도 없는 선거입니다. 국민통합을 지향하지 않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분파적 힘의 행사에 불과합니다.”
40대 소장파 법조인인 차병직(車炳直)변호사는 “솔직히 이번 선거엔 관심이 없다”며 “선택할 후보자가 없는 선거에서 투표장에 들어가면 결국 지역주의에 따라 투표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번 선거가 예전보다 ‘돈을 덜 쓴 선거’라는 데는 차변호사도 인정한다. 그는 그러나 “이번의 흑색선전과 지역감정 조장행위를 보면 논평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겠다”며 말문을 닫았다. 허교수는 ‘민주주의 파괴를 위한 국력낭비’라고까지 질타했다.
선거과정을 지켜본 많은 여론지도층 인사들의 결론은 간명했다.
이제 우리 정치, 우리 선거, 나아가 우리 삶의 현장에서 지역주의라는 ‘괴질(怪疾)’을 도려내고 추방하지 않는 한 21세기는 우울한 밀레니엄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었다. 지역주의가 바로 이 시대, 우리가 정면으로 맞서 싸워나가야 할 지상과제임을 분명히 자각하는 일이야 말로 이번 선거가 남긴 교훈이라면 교훈이라는 것이다.
〈김창혁기자〉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