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선제라는 권력구조 뿐만 아니라 왜곡되고 짓눌려 있던 사회 전반의 제도와 틀이 변화하기 시작, 민주사회의 새 지평을 열었다.
‘6·10’항쟁의 정치사적 의미에 대해 학계에서는 여러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이 군부독재에 저항, 민주주의를 쟁취한 민주혁명이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넥타이부대’로 상징되는 중산층이 항쟁에 적극 가담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시민혁명’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6·10’항쟁의 직접적인 동인(動因)은 가깝게는 ‘4·13’호헌조치, 멀게는 그해 1월에 터진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이었다.
‘12·12’와 ‘5·17’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全斗煥)군부독재정권의 강권통치는 84년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과 이듬해 ‘2·12’총선에서의 신민당 돌풍으로 기세가 꺾였다. 여기에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당황한 군부독재정권은 ‘4·13’호헌조치라는 초강수로 대응했으나 호헌조치는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됐고 이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됐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대학가 뿐만 아니라 거리를 뒤덮었으며 마침내 ‘6·10국민대회’로 그 절정을 이뤘다.
경찰에 붙잡힌 대학생들을 시민들이 빼내주고 택시운전사들은 때맞춰 일제히 ‘경적시위’를 벌이는 등 민주화세력과 시민들은 혼연일체가 됐다. 전날 발생한 연세대생 이한열(李韓烈)군의 최루탄피격사건도 사태확산에 일조했다.
마침내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하는 ‘6·29항복선언’을 받아내기에 이르렀고 그해 12월 대통령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당시 선거에서 민주화세력이 후보단일화에 실패, 노태우(盧泰愚)정권에 권력을 ‘헌납’하는 바람에 그 의미는 반감됐다.
그러나 5년 후 문민정부 출범에 이은 50년만의 여야정권교체에 따른 ‘국민의 정부’의 탄생으로 ‘6·10’항쟁의 뜻은 비로소 실현되는 기반이 조성됐다. 민주주의의 절차와 형식은 상당 부분 갖춰졌고 지방자치제도 2기 선거까지 치러 큰 진전을 보는 등 ‘6·10’당시 민중의 요구 중 많은 대목은 현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도 ‘6·10’의 고귀한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대목도 없지 않다. 6공정권은 차치하더라도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金泳三)정권은 의욕적인 개혁에도 불구, 독단 독선의 권위주의적 국정운영방식으로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인사를 비롯해 정책적인 면에서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재 국민의 정부도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민주적 리더십의 확립에 누구보다 신경쓰고 있지만 진정한 지역통합, 국민통합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무엇보다 현시점에서 민주주의의 완성은 경제난국을 극복, ‘제2의 도약’의 토대를 마련해야만 가능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동시달성이야말로 ‘6·10’항쟁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이기 때문이다.
〈최영묵기자〉m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