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햇볕’으로 대변되는 김대중(金大中)정부의 대북정책 내용 그 자체는 하등 나쁘달 것이 없다. ‘햇볕’이란 포장이나 문패도 매우 서정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런데도 왜 그동안 그토록 엄청난 시비와 논란이 일고 안팎으로 시끄러웠는가. 한마디로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속초 앞바다 꽁치어망에 북한 잠수정이 걸리고 이어 무장간첩 시체가 묵호 앞바다로 표류해 왔을 때 그렇게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었다. 옛날같으면 당장 규탄성명이 빗발치고 난리가 나야 할 판인데 그렇지가 않았다. 즉각 응징태세보다는 잘나가는 대북 교류사업에 악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자세가 역력했다. 햇볕정책의 첫 시험무대에서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크게 보아 ‘햇볕정책’은 북한의 도발 불용(不容), 흡수통일 불원(不願), 화해 교류 협력이라는 김대중대통령의 이른바 대북 3원칙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을 경우 도발불용 원칙에 입각, 가차없는 응징이 뒤따라야 옳다. 당근과는 별개로 채찍의 매서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 그럼에도 실제 적용과정에서 첫째 둘째 항목은 뒷전에 밀리고 세번째 화해 교류 협력 대목만 강조되다 보니 그것이 새 정부 대북정책의 주류인양 오해받는 형국이 돼버렸다.
그러잖아도 김대통령은 야당시절 색깔시비로 곤욕을 치른 처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말끔히 가셨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DJ죽이기’ 방편으로 악용됐건 어쨌건 그런 시각의 일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거기에 일부 참모들이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며 대북 강경대응을 꺼리는 듯한 자세를 보여 필요 이상의 시비를 불러 일으켰다.
그 결과 정책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석연찮은 눈으로 햇볕정책을 보는 시각이 늘었다. 좁은 의미의 대북 유화정책, 일방적 대북 시혜정책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북은 전혀 달라진 것 없이 도발책동을 계속하는데도, 계속 그렇게 당하면서까지 무조건 감싸안으려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는 게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김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햇볕은 감싸기도 하지만 음지에 있는 악한 균을 죽이기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북한의 강경세력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정책이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웅성거리는 여론에 실은 그게 아님을 강조하려다 나온 은유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북이 들으면 기분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남북분단의 현실과 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지적한 것일지라도 북의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 상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너희가 햇볕이고 양지라면 우리는 음지에 기생하는 악한 균이라는 이야기냐. 햇볕으로 우리를 깡그리 녹여 없애버리겠다는 것인가. 어디 그렇게 쉽게 되는지 한번 해볼거냐… 이렇게 반발하고 나올 수도 있는 문제다. 남북관계에는 평양정권이라는 상대가 있는데 햇볕정책도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체제와해를 유도하는 방법론이라는 식의 주석까지 덧붙여 북한의 경계심을 촉발한 것은 사려깊지 못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결국 ‘햇볕’이란 용어의 이미지는 우리 내부적으로 시비와 논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크게 상처를 입고 훼손됐다.
북한 또한 고슴도치처럼 웅크리며 거부하는 자세로 나오고 있는 만큼 어느 쪽으로부터도 축복받는 용어는 아닌 것같다. 경위야 어떻든 이처럼 오해소지가 많은 용어를 계속 쓰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용어 때문에 실제 적용과정에서 효험이 떨어진다면 문제가 있다. 현실에 살아 움직이는 정책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아쉽더라도 다른 적절한 말로 문패를 갈아 다는 것이 현명하다고 본다. 중지를 모아 찾아보면 남북 모두에 긍정적 이미지를 함축하는 상징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만약 달리 마땅한 용어가 없다면 ‘한민족공동체’도 좋고 그냥 ‘남북화해’ 또는 ‘포용’정책으로도 족하다고 본다.
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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