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F교훈 잊은듯
국제통화기금(IMF)의 첫 충격은 청천벽력이었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 불현듯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보았다. ‘이런 식으로 살았다간 나라도 망하고 나도 죽는구나….’ 이렇게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냄비근성’은 이번에도 크게 예외는 아닌 것같다. 겨우 8개월 남짓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벌써 기억상실증으로 무뎌지고 있다. 지난날의 그 반칙과 변칙이 곳곳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길거리 교통혼잡 하나만 봐도 실감하게 된다.
사람들의 이런 심성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IMF조기탈출도 ‘제2의 건국’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진실로 ‘제2의 건국’을 바란다면 너무 거창하게 벌일 것도 없다. 아주 작은 일로부터 규칙과 질서를 바로 잡아나가면 된다. 과거야 어쨌든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원칙과 상식에 따라 정상적으로 살 생각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상식론을 왜 또 들먹이느냐고 진부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정작 무시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가장 상식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진리를 우리 모두는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오늘의 이 난국도 상식 따로, 행동 따로의 이중성에 근본원인이 있다. 원칙이 대접받는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여야 서로 믿고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 예측가능한 사회가 된다. 미래설계도 가능해진다.
▼ 상식이 바로 통해야
어느 국가, 어떤 사회나 그 바탕을 지탱하는 기본가치와 원칙이 있게 마련이다. 50, 60년대 보릿고개 시절만 해도 인성(人性)이 이렇게 황폐하지는 않았다. 공동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인정과 신뢰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압축성장기로 접어들어 실적주의 적당주의 졸속주의가 득세하면서 기초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초가 부실해지기는 건조물이나 경제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구조도 함께 무너졌다. 그 결과가 지금의 이 고통이다.
이런 국난의 시기에 국가경영을 맡은 김대중(金大中)정부의 책무는 실로 막중하다. 반칙에 병든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너진 원칙과 상식부터 바로 세우는 일이 급선무다. 타성(惰性)의 껍질을 과감히 벗겨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총체적 부실의 악순환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그러자면 위정자(爲政者)가 먼저 뼈를 깎는 솔선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법과 제도, 원칙과 순리에 따라 나라를 경영하고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일 때다.
그렇다면 이 정권은 지금 원칙대로 정도를 가고 있는 것인가. 출범 6개월의 성적표는 그러나 기대에 훨씬 못미친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칙도 흔들리고 개혁도 주춤거리는 느낌이다. 모든 개혁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정치개혁만 해도 다짐들은 요란하지만 결국 과거정권이 밟고 간 잘못된 길을 되풀이해 걷고 있지 않는가. 7·21 재보선의 경우 엄청나게 쏟아부은 돈도 돈이지만 선거때면 으레 나타나는 부정적 작태들이 모조리 다 등장했다는 점에서 개혁주도세력들로서는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경위와 사정이야 어떻든 한쪽에서는 사정(司正)의 칼날을 번득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사면 복권이라는 이름으로 비리연루 정치인들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린다면 무슨 명분으로 강도높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가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여야 비로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국민적 지지와 동참도 기대할 수 있다.
▼ 자신에게 엄격했으면
준비된 사람도, 책임질 사람도 오직 한사람 뿐이라는 세간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1인이 모든 것을 다 챙기고 위에서 지시가 없으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인치(人治)로 나라가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옛날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김영삼정권의 실패는 법과 제도가 아닌 인치에 의존했기 때문임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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