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의 전신은 정부가 출범한 48년 일주일 간격으로 설립된 감찰위원회와 심계원. 각기 직무감찰과 회계검사를 나눠 맡았다.
당시 감찰위원회의 권한은 막강했다. 49년 조봉암(曺奉岩)농림부장관 임영신(任永信)상공부장관의 파면을 의결하는 등 권력과의 마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55년 감찰위원회는 해체되고 징계의결권이 없는 사정위원회로 바뀌었으나 4·19혁명으로 감찰위원회가 부활됐다. 이후 63년 심계원과 통합돼 감사원으로 발족했다.
감사원은 이원엽(李元燁) 한신(韓信) 이주일(李周一) 이석제(李錫濟)씨 등 군출신 원장들이 잇따라 취임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60년대)과 서정쇄신(70년대)을 지원하는 기능을 맡았다.
이 기간 중 71년 감사원 직원의 3분의1을 잘라내는 물갈이가 이뤄졌고 78년에는 감사관의 폭행사건과 농협의 고구마수매사업 감사로 ‘표적감사’시비를 낳기도 했다.
80년대 5공시절에는 주요시책사업에 대한 ‘효율성감사’에 중점을 뒀고 6공 때는 ‘민생감사’에 주력하면서 위상제고를 위한 노력도 벌였다.
5공때는 학자출신의 이한기(李漢基)원장, 검사출신의 정희택(鄭喜澤)원장을 거쳐 군 출신의 황영시(黃永時)원장이 연임했다. 6공 들어 김영준(金永駿) 이회창(李會昌) 이시윤(李時潤)원장 등 판사출신이 뒤를 이었다.
90년대 감사원은 이문옥(李文玉)감사관과 현준희(玄俊熙)주사의 내부비리 폭로로 크게 내상(內傷)을 입기도 했다.
이제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인권변호사 출신의 한승헌(韓勝憲)원장이 취임하면서 ‘정부 내 비판세력’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한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7일 감사원 직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점심을 함께 하며 “감사원이 바로 서야 국정이 바로 선다”며 소신있는 감사를 주문했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