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정의 대상 전락하나 ▼
여야 극한대결로 치달아온 우리의 사정(司正)정국 또한 그렇다. 지금 사정의 옳고 그름은 온데 간데 없다. 여당과 야당은 사정의 수단 방법 범위를 놓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동원해 상대방을 헐뜯고 나를 변호한다. 양쪽 모두 밀리면 끝장이라는 자세다. 마지막 배수진을 친 치열한 힘의 대결이다. 그 결과 사정은 어느덧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할 기미를 보인다. 왜 사정을 시작했는지조차 모르게 됐다.
불행한 것은 이러한 사정정국의 전개가 정치에 대한 국민의 혐오를 확산시키고 냉소를 부추긴다는 점이다. 정치란 더러운 것, 정치인은 모두 도덕적 불구라는 인식의 확산은 정치발전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대의정치와 정당정치의 위기를 재촉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른다. 이 위기를 극복하자고 시작한 사정이 위기를 더 증폭시킨다면 그보다 더한 불행이 없다.
다시 따져보자. 사정은 왜 필요한가. 사정으로 과거 정권의 그늘에서 정경유착을 통해 성장한 부패 비리정치인을 정치현장에서 퇴출시키고 참신하고 헌신적인 엘리트를 정치권에 영입해 들여 정치문화를 개혁하는 일대 전환의 계기를 만들기를 국민은 희망했다. 정치개혁 첫 단계로서 철저한 인적(人的) 청산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착수단계에서부터 흔들렸다. 표적사정 편파사정 시비 때문이었다.
그것은 실은 예고된 진행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청와대측이 당초 “전면적 총체적 사정은 없다”고 선을 그은 것부터 수상했다. 사정에 정치적 계산이 끼여들 여지를 남긴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청와대측은 “철저히, 성역없이, 여야없이, 형평에 맞게, 적법하게” 의혹을 조사하겠다는 언명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사정의 진행상황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속인 꼴이 돼가고 있지 않은가.
▼ 피장파장인 대선자금 ▼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국민회의는 사정을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의 도덕성을 훼손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한나라당이 안기부와 국세청을 동원해 대선자금을 모은 ‘부도덕한’ 정당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철새’ 몇몇을 불러들여 그렇게도 갈망하던 여권의 안정의석도 확보했다. 사정정국이 ‘독재정권과 민주세력의 대결’국면이라는 한나라당의 ‘억지’에 여론이 동조하지 않은 것도 여권으로서는 얻은 것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란 묘한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한나라당과 이회창총재도 분명 얻은 것이 있다. 잃은 것보다 오히려 더 클 수도 있다. 이총재는 대선자금문제에 맞불을 놓아 김대통령의 속죄하지 않은 원죄를 또 한번 환기시켰다. 그 결과 대선자금문제는 영원히 피장파장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이 다시 드러났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김대통령에게 끝내 벗어던지지 못한 괴로운 짐으로 남게 됐고, 이총재는 망외(望外)의 소득을 얻었다.
정체성 없이 표류하던 한나라당이 일정한 ‘야당성’을 확보하고 이총재의 당내 지도력이 일거에 강화되는 계기를 맞은 것도 주시할 만하다. 이총재는 당의 확실한 구심점으로 부각되는 호기(好機)를 잡았다. ‘야당총재 이회창’의 정치적 위상은 위기 속에서 높아졌고, 이총재는 ‘더도 덜도 없는 정치인’으로 재탄생했다. 한나라당의 편파사정 표적사정 주장이 여론에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한나라당의 회심의 수확으로 기록될 만하다.
▼ 최종 「감리자」는 국민 ▼
이것이 요란했던 사정이 여야에 남긴 정치적 득실의 전부라면 실망이다. 어차피 정치란 추악한 현실의 단면일지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정치인은 이상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의 돌멩이 하나 역할쯤은 자임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국민의 소박한 소망이다.
만약 오늘의 우리 정치인들이 그런 최소한의 역할을 눈곱만큼이라도 의식한다면 여야는 개혁에 합의해야 옳다. 사정 앞에 겸허해야 옳다. 사정정국의 여야간 계산서는 그때 비로소 나올 수 있다. 그 계산서의 최종 감리자는 국민이다.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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