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에 의해 주도된 오익제(吳益濟)편지 사건이나 윤홍준(尹泓俊)씨 기자회견 사건 등은 북한정권과는 직접 관련없이 ‘자가(自家)발전’형태로 북한을 이용한 공작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특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실정법이 ‘적(敵)’으로 규정한 북한군에 총격전까지 요청했다는 점에서 경악을 안겨준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적과 손잡고 전시상황을 연출해 냉전시대의 투표 분위기로 몰아가려 했던 것이다.
검찰과 안기부가 밝힌 사건 전모는 다음과 같다.
J그룹 고문으로 일하던 한성기(韓成基·39)씨는 지난해 9월 해외여행중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의 측근인사를 만났다. 한씨는 이 측근인사에게 이후보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이후 수시로 이 측근에게 대선관련 정보와 여론을 보고해왔다.
한씨는 같은해 11월초 K대 언론대학원 동기생인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 오정은(吳靜恩·46)씨를 만나 “대선후에도 자리를 유지하려면 이후보를 만나야 한다”며 이후보와의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오씨는 이 말을 듣고 동료인 민정비서실 행정관 조모씨(34)와 함께 이후보의 대선지원 비선보고팀을 구성했다.
며칠 후 오씨는 한씨와 함께 이회창후보 집앞에서 당사로 나서는 이후보에게 인사를 하고 비선조직 구성 및 운영 사실을 보고했다는 것. 이들은 12월초까지 대선관련 각종 정보보고서와 이후보 이미지개선 보고서 15건을 작성해 이후보측에 전달했다.
11월 중순 한씨와 오씨는 대선후보 지지 여론조사결과 등을 분석하면서 “현재 상태로는 이후보의 당선이 어렵다. 지지율을 반전(反轉)시키기 위해서는 북한 카드를 활용하는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대책을 강구키로 했다.
이무렵 오씨는 평소 자신에게 북한관련 정보를 제공해오던 대북교역 사업가 장석중(張錫重·48)씨를 만났고 이어 장씨를 한씨에게 소개했다. 이들 3명이 11월20일경 한자리에 모여 이후보 당선대책을 논의하던 중 장씨는 “북한은 DJ(김대중후보)당선을 바라지 않으며 그의 당선 저지를 위해 뭔가를 꾸밀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에 오씨와 한씨는 장씨가 대북사업과정에서 접촉하는 북한측 인사를 통해 ‘판문점 총격시위’를 요청키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한씨와 장씨는 12월10일 중국 베이징(北京) 캠핀스키호텔에서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참사관 이모씨(44)와 아태위원회 참사 박모씨(50)를 만났다. 거기서 한, 장씨는 ‘이회창후보 비밀정책특보’라고 적힌 명함을 건네면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우리 군에 총격을 가하면서 총격전을 벌여달라”고 요청했다. 한씨는 또 북측에 “DJ의 친북활동 자료가 있으면 달라”고 요청하면서 “당신들이 도와주면 빠른 시일내에 비료 등 당신들이 원하는 경제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의했다.
한씨 등은 이틀 동안 더 머물며 북한측의 답변을 기다렸으나 이씨가 “이번에는 어렵겠다”고 하자 곧바로 귀국해 판문점 무력시위 요청사건은 미수로 끝났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