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는 김종필(金鍾泌·JP)자민련 총재의 내각제 개헌 발언으로 술렁거렸다. JP의 내각제 발언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좀 느낌이 달랐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임기 만료 전에 내각제 개헌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김대통령이 내각제를 결심하고 선두에 나서 정계개편을 시도하면 협조할 용의가 있다. 대통령선거 대신 내각제 국민투표를 해 내년 2월25일 내각제 정부를 출범시키면 된다.”
김총재는 “통합선거법에는 12월18일 대통령선거를 치르도록 돼 있지만 헌법에는 임기전 70일 내지 40일 전에 선거를 하도록 돼 있는 만큼 선거일을 늦출 수 있어 내년 1월10일까지 여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사람은 역시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DJ)총재. 한창 내각제를 고리로 JP와 대선후보 단일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던 DJ로서는 불쾌하면서도 애를 태울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7월21일 전당대회에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이회창(李會昌)후보측도 신경이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자민련 내에서도 발언 배경을 놓고 구구한 억측이 뒤따랐다. 나흘 뒤인 9월9일 자민련 의원세미나 퇴소식에서 JP의 해명이 나왔다.
“내용은 공개하지 않겠지만 신한국당에서 어떤 얘기가 왔다. 그래서 기본적인 것을 다시 환기시킨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시간없다고 하지 말라’고 촉구한 것이다.”
JP의 말은 사실이었다. JP의 발언이 있기 얼마 전인 8월 어느날. 당시 정부 고위인사가 JP의 청구동 자택을 찾았다.
장남의 병역문제로 수세에 몰린 이회창후보가 DJ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JP와의 화해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참을 얘기했지만 JP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김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청구동 JP의 집에서 나온 이 인사는 김용태(金瑢泰)청와대 비서실장에게 JP의 메시지를 전했다. 물론 이총재에게도 전했다.
그러나 청와대나 이총재측의 대답은 ‘NO’였다.
얼마 후 정부 고위인사는 다시 청구동을 찾았다.
비록 아무런 답신을 가져가지는 못했지만 이 인사는 “(다시 합치기만 하면)대선 공약으로 내각제 개헌을 내세울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호소했지만 JP는 “이미 늦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0월27일. JP가 밤늦게 청구동을 찾아온 DJ에게 이른바 ‘DJP(DJ+JP)후보단일화’를 약속하면서 김영삼대통령과 JP의 내각제 제휴론은 ‘찻잔 속의 폭풍’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사실 JP가 말한 ‘여권쪽의 내각제 손짓’은 정부 고위인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JP를 측근에서 보좌하던 자민련 L의원의 증언.
“97년 8,9월경 신한국당의 이모의원,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 그리고 내가 내각제 개헌문제를 함께 논의했다. 요지는 대선 전에 이의원이 자파(自派)의원들을 데리고 탈당한 뒤 DJ 주도로 국민회의, 자민련과 함께 내각제 개헌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의원이 (신한국당을) 나오고, 김영삼대통령까지 (내각제 개헌 쪽으로) 움직이면 결국 신한국당에는 소수의 ‘이회창 추종자’들만 남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DJ가 동의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불확실한 대선을 치르느니 연립내각을 세우는 데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권부장도 한 때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한 일주일 정도는 일단 ‘성사된 상태’가 유지됐다. 하지만 나중에 권부장으로부터 어렵다는 통보가 왔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권부장도 ‘한 때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이 한 때 내각제 개헌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는 얘기일까.
L의원은 “권부장의 말에는 분명히 김대통령의 의중이 실려 있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물론이고 자민련의 또 다른 핵심인사도 해석을 달리했다.
또 다른 핵심인사의 설명.
“당시 여권, 특히 청와대의 여러 인사들이 우리 쪽과 접촉했다. 김용태비서실장은 물론이고 김광일(金光一)특보까지 나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김실장은 김대통령의 의중을 드러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김광일특보―JP진영’간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를 물어보는 식이었다. 청와대측이 이중플레이를 했거나 아니면 오락가락했던 것 같다.”
이회창후보측도 김대통령을 의심했다.
이후보가 청와대와 JP진영간의 접촉이 있은 직후인 9월 말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권력구조 개편용의를 ‘가장(假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김대통령은 정말 내각제에 유혹을 느꼈을까. 유혹을 느낀 흔적은 있다. 그것도 임기 중반 무렵부터….
김대통령의 오랜 지기(知己)인 K씨의 설명.
“95년 6·27 지방선거 직후였습니다. 김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했습니다. 지금 여당에는 대통령 후보감이 한명도 없다. JP하고 손잡고 내각제를 하는 길밖에 더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김대통령도 한참 생각하더니 ‘좋다’고 하더군요. 내친 김에 ‘그럼 그렇게 알고 내가 JP한테 얘기하겠다’고까지 했더니 김대통령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나는 JP의 친형인 종락(鍾洛)씨와 잘 아는 사이일 뿐만 아니라 JP와도 여러차례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틀 뒤 JP와 서울 강남의 아미가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습니다.”
K씨는 그러나 바로 다음날 아침 김대통령으로부터 “어제 한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K씨는 순간 ‘김대통령이 또 현철(賢哲)이 얘기를 듣고 번복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국 K씨는 다음날 JP를 만났지만 아무런 메시지도 줄 수 없었고 술잔만 비웠다.
K씨의 계속되는 설명.
“96년 총선 이후에도 다시 내각제를 권유했지만 김대통령은 그 때에도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음날 아침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번복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97년 들어서도 몇번 얘기했지만 김대통령은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더군요.”
민주계도 내각제에 유혹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노동법 파동, 한보사태, 김현철씨 청문회가 이어지면서 민주계 중심의 정권 재창출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민주계 일각에서 내각제 개헌이 ‘비상탈출구’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97년 3월 민주계 원로인 김수한(金守漢)국회의장이 김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에서 내각제 얘기를 꺼낸 것은 그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김의장 측근의 기억.
“대통령선거 해인 97년에 들어서면서 민주계 내부에서는 ‘DJ에 대항할 만한 마땅한 후보도 없고, 신한국당 후보감이라고 해봐야 모두 외부 영입인사인 바에야 개헌을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노동법 날치기 처리 직전에 자민련과 ‘97년 1월 합의처리’라는 이면합의가 오가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한 JP와의 재결합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도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민주계 내부에서 조직적이고 깊숙한 논의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계 좌장으로 당대표를 강력히 희망했던 최형우(崔炯佑)의원도 3월 초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며칠 전 김윤환(金潤煥)의원에게 “내각제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의중을 타진했다. 김의원의 반응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대선정국이 막을 올리자 각 정파는 나름대로의 유불리(有不利)를 저울질하며 내각제에 접근했다.
내각제 개헌론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김대통령은 “임기중 개헌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정국 돌입과 함께 내각제 논의는 가열됐고 결국 내각제를 고리로 성사된 DJP연합은 DJ 대선 승리의 견인차가 되고 말았다.
〈김창혁·김정훈기자〉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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