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예산안은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에서 예결위 전체회의를 거쳐 이날 본회의에 회부되기까지 가는 길목마다 발목이 붙들렸다. 84조9천여억원의 예산중 20억원에 불과한 제2건국위 지원 예산의 삭감문제를 둘러싼 여야의 대립 때문이었다.
여당은 그동안 “제2건국위 지원예산 20억원을 항목 그대로 관철시키겠다”며 일관된 입장을 취해왔다.
다만 정국을 원만하게 풀어가야 할 여당으로서 ‘대통령의 뜻’ 만을 내세워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야당인 한나라당은 제2건국위 예산과 관련해 시종 비판적 시각을 보여왔지만 예산안과 연계하는 과정에서 일관된 원칙이 없이 ‘갈지자걸음’을 해왔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한나라당은 법정시한을 하루넘긴 3일 오전만 해도 제2건국위 예산에 그리 집착하지 않아 예산안 처리 가능성이 점쳐졌다.
하지만 이날 저녁 ‘총풍(銃風)’사건에 관련된 이회창(李會昌)총재의 검찰조사면제문제가 예산안과 연계돼있다는 ‘빅딜설’이 돌출하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한나라당은 ‘제2건국위 예산은 절대 안된다. 예산안심의에 응할 수 없다’는 강경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총재는 주말을 거치면서 더 이상 예산안 처리를 끌지 않기로 마음먹고 7일 오전 총재단회의에 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표결처리 수용’의사는 물밑채널을 통해 여권에도 전달됐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대부분의 부총재들이 “제2건국위는 정권의 홍위병으로 큰 불씨가 될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하자 이총재는 주춤했다.
이총재는 이날 오후 의원총회에서 또 한번 의견수렴에 나섰으나 “20억원이통과되면 총재가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등 강경론이 득세하면서 뜻을굽혔다.
이 와중에서 이총재는 이날 예산안을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에서 통과시키는 데만 동의했다. 하지만 예결위 전체회의에서의 표결처리는 지연시키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이날도 예산안은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표류했다.
이날 뿐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은 8일에도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찬반투표를 거부하고 전원 퇴장하는 방식으로 예산안 통과를 묵인했지만 이날중 본회의 처리는 안된다고 버텼다.
이는 당내 강경파의원들이 이총재를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일부 의원은 이총재를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통해 “육탄저지를 해서라도 예산안 통과를 막아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했다는 후문이다.
강경파 의원들은 “내년들어 제2건국위가 본격 가동될경우 16대 총선을 1년여 남겨놓은 중요한 시점에서 야당조직은 급격하게 와해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나라당은 여당측과 ‘9일 오후 본회의를 열어 예산안을 다룬다’는데 합의해 예산안 처리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모습이다.
당 일각에서는 이총재가 강경파들에 둘러싸여 그들의 뜻을 따르지도, 그렇다고 소신대로 의원들을 설득하지도 못하는 ‘정치력부재’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철·김정훈기자〉full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