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당사로 돌아가는 승용차 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김총재는 옆자리의 유재건(柳在乾)총재비서실장에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믿을 만해.”
YS가 믿을 만하다는 얘기였다. DJ는 YS의 ‘무엇’이 믿을 만하다는 것이었을까.
사실 이날 두 사람의 회동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 많다. 먼저 회동순서.
김대통령은 대선후보들과 개별회동 계획을 발표하면서 DJ와의 만남을 첫번째로 집어넣었다.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후보측에서 노골적으로 ‘YS―DJ 막후거래설’을 퍼뜨릴 정도로 이례적인 면담순서였다.
비록 이틀 전 김대통령을 향해 “신한국당을 떠나달라”고 결별을 선언하긴 했지만 아직은 당의 명예총재였다.
불쾌감을 누르고 맨 마지막 순서로 청와대 일정을 절충한 이후보 진영은 결국 회동을 거부하고 말았다.
이후보 진영의 서상목(徐相穆)선거기획본부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대통령이 이인제(李仁濟)후보를 지원한다는 이중플레이 의혹에 이어 김대중총재와 거래한다는 삼중플레이설이 있는 마당에 이총재가 들러리를 서지는 않을 것”이라며 흥분했다.
DJ가 단순히 그런 이례적인 프로터콜(의전) 때문에 김대통령을 “믿을 만하다”고 했을까. 이회창후보 진영의 의심은 전혀 근거없는 분풀이였을까.
나중에 김대통령으로부터 당시 ‘김심’(金心·김대통령의 의중)을 전해들은 민주계 중진 S의원의 증언은 어렴풋한 해답을 준다.
“이회창후보 진영이 ‘DJ비자금 파일’을 폭로한 뒤 김대중총재가 몇차례나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김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짓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김대통령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틀림없이 뒷말이 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김대통령은 그때 자신의 5년 전 취임식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김대통령은 취임식장에 야당의원들이 불참하는 바람에 ‘반쪽 취임식’이 되고 만 것 때문에 자존심이 몹시 상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그 얼마 뒤 참모들이 국회연설을 건의하자 ‘차라리 민자당 의원총회에서 연설하는 게 낫다’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김총재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취임식 때 일이 떠오르더라는 겁니다. ‘반쪽 취임식’의 원인이 결국은 동서분열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 이어 ‘김총재라면 동서화합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김대통령이 비록 김총재의 전화를 받지는 않았지만 김총재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는 게 S의원의 설명이다.
그 직후 김태정(金泰政)검찰총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 DJ비자금사건 수사유보를 선언한다.
이회창총재는 물론이지만 DJ진영도 김총장의 기자회견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뤄졌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DJ는 10월24일 회동에서 바로 그런 ‘김심’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YS가 ‘김대중대통령’을 저지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회창진영이 ‘YS―DJ 막후거래’를 의심할만한 정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비슷한 정황은 그 이전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김대통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자출마를 선언한 직후인 9월23일 김광일(金光一)대통령정치특보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만났다.
김특보는 “김대통령이 아직도 DJ는 절대 안된다는 입장이냐”는 일부기자의 질문에 “최소한 내가 특보로 들어온 이후에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고 답변했다.
특히 당시 무소속이긴 했지만 김대중총재진영의 신뢰가 깊은 홍사덕(洪思德)의원이 전격적으로 정무장관에 기용된 이후 보인 행보는 더욱 그랬다.
홍장관도 “김대통령이 아직도 DJ는 절대 안된다는 입장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한 홍장관의 답변은 “사람들에게 YS에 대한 입력이 잘못돼 있다. 지금 YS는 폭좁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홍장관은 정무장관으로 기용된 이후에도 김대중총재를 항상 ‘우리 총재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장관 취임 직후 DJ를 만나 대선과정에 김대통령이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DJ의 요구가 논리적으로 무리한 주문이라는 YS의 뜻을 전했다. 그는 대신 ‘공정관리’라는 개념으로 실질적인 중립을 지키겠다는 YS의 뜻을 전하고 동의를 받아냈다.
김광일특보의 발언이나 홍장관의 행보는 물론 공정관리를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정치권, 특히 이회창후보 진영의 시각은 달랐다.
당시 청와대와 이후보 진영의 기류에 모두 밝았던 신한국당 중진의원의 증언.
“김대통령은 신한국당을 탈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회창총재와 주례회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대통령후보 지명 때 50%를 넘나들던 이총재의 여론지지율이 아들의 병역기피의혹으로 급락하자 김대통령은 주례회동 때마다 이총재에게 ‘지지율이 떨어져서 큰일이다. 오늘도 몇 %나 하락했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총재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런 일련의 흐름 끝에 김대통령과 김총재가 조홍래(趙洪來)청와대정무수석의 배석까지 물리치고 대좌하자 이총재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김대통령과 김총재의 ‘10·24 청와대회동’ 직후의 상황은 또 달랐다. 두사람의 막후거래설이 퍼지자 청와대 일각에서는 김대통령에게 이총재와의 회동을 건의했다.
김대통령이 이미 공정한 대선관리를 선언한 만큼 이총재를 만나야 한다는 논리였다.
김대통령의 오랜 지기(知己)인 김윤도(金允燾)변호사도 나섰다. 김대통령과 이총재의 ‘관계 정상화’를 강조하던 김변호사는 “지금 김대통령의 행동을 보면 모두 김대중씨의 당선을 바라는 것 같은 행동이다”라며 이총재와의 회동을 권고했다.
김대통령의 마음도 흔들렸다. 그래도 ‘유종의 미’는 거둬야겠다는 이유에서였는지, 아니면 ‘그래도 김대중은 안된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김대통령은 이총재와의 회동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청와대 참모들만으로 안되자 김대통령은 김변호사에게 이총재가 청와대에 들어오도록 설득해줄 것을 당부하기까지 했다.
김변호사의 기억.
“사실 그때가 막판 분수령이었다. 만약 그때 이총재가 김대통령을 만났더라면 선거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총재 주변의 7인방인가 하는 사람들이 이총재의 청와대행을 막았다.”
이총재진영도 부산 경남(PK)지역에서의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김대통령과의 회동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의 병역면제의혹으로 급락했던 이총재의 지지율이 반등해 판세가 이미 이회창―김대중후보의 2파전으로 압축되자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 자력에 의한 승리도 장담하고 있었다.
11월21일 청와대에서 열린 IMF 구제금융 위기에 즈음한 ‘경제 영수회담’은 ‘김심’이 이총재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김대통령이 캐나다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하기 하루 전날 열린 이날 회동에서 이총재는 김대중총재와 박태준(朴泰俊)자민련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늘의 경제위기는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APEC에는 왜 가느냐”고 몰아붙였다.
이총재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김심’이 DJ쪽으로 직행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냥 손을 놓은 채 선거일(12월18일)을 맞이했다고 해석하는 편이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김태정검찰총장에게 ‘DJ비자금’ 수사유보를 지시하면서부터 ‘김대중후보가 이길지도 모르고, 또 이겨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감추고 있었다는 게 측근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김대통령도 퇴임 후 어느 자리에서 ‘내가 아니었으면 김대중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말로 대선당시 심경의 일단을 비쳤다는 후문이다.
〈김창혁·김정훈기자〉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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