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 칼럼]유언비어에 숨은 뜻은…

  • 입력 1999년 1월 26일 19시 24분


최용수는 국가대표 축구팀 스트라이커다. 우리나라 축구팀이 작년 프랑스 월드컵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프랑스 본선무대에서는 벤치를 지켰다.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최선수가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기독교신자인 차범근감독이 최선수를 기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언비어였다. 최선수와 호흡을 맞추며 공격진의 투톱을 이루다 최선수가 빠지자 원톱으로 분투했던 김도훈선수도 불교신자다.

▼현실에 대한 불만…불안 ▼

부산지방에서는 또 다른 소문이 나돌았다. 최용수선수가 부산출신이기 때문에 선발에서 제외됐다는 것이었다. 역시 유언비어였다. 월드컵팀 철벽의 골키퍼 김병지선수는 다름 아닌 부산 소년의 집 출신이다. 호남정권이 들어서더니 부산출신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도 물을 먹는다는 투정도 들렸다. 실제로 작년 미스코리아대회에서 부산 경남대표는 입상권에 들지 못했다. 그러나 최종심에 오른 12명의 미녀중 3명이 대구 경북대표였고 8명의 수상자중 2명이 역시 대구 경북대표였다. 부산지역의 ‘호남정권’에 대한 거리감이 뜬소문으로 번진 것이다.

유언비어란 그런 것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부정을 잔뜩 품고 있다. 박탈을 두려워 하는 불안과 박탈해갈 것으로 상정되는 상대에 대한 적대감이 묻어 있다. 원망(怨望)일 수도 있고 원망(願望)일 수도 있다. ‘전라도에는 실업자가 없다’ ‘대기업 빅딜은 경상도 죽이기다’ ‘구미공장을 뜯어다 광주에 짓고 있다’는 등 근거없는 풍문들에도 숨겨진 뜻이 있다. 지역감정이 섞인 정권에 대한 불신이다.

유언비어 연구의 고전인 올포트와 포스트먼의 ‘유언비어의 심리학’이 전하는 예도 있다. 1943년 미국 남부에 묘한 소문이 나돌았다. 흑인 하녀들이 프랭클린 루스벨트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정신적 지원 아래 백인 여인들에게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지역감정의 선입견▼

‘백인 여인이 외출했다 돌아오니 흑인 하녀가 주인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는 따위의 유언비어가 불처럼 번져나갔다. 반(反)흑인감정과 뉴딜정책의 자유주의에 대한 증오심이 루머로 표출된 것이다. 올포트와 포스트먼은 이를 ‘지위의 전도(顚倒)’에 대한 공포라고 정의했다.

유언비어에는 일정한 소재(素材)가 있다. 그리고 이를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억압된 충동이 있어야 하고 그 충동을 수용하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있어야 한다. 사회심리학자들의 말이다. 영남지역의 유언비어에도 일정한 소재가 있다. 호남 ‘편중인사’와 영남인사에 대한 ‘표적사정’, 기업부도와 실업, 영남지역 은행 기업 퇴출과 삼성 LG가 포함된 빅딜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지역감정이라는 뿌리깊은 선입견이 있다. 정부 여당이 아무리 지역편중이 아니라고 해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다.

더구나 한번 유포된 유언비어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소재 자체가 소멸되지 않는 한 ‘진실’에 압도돼 잠시 잠행하다가 옷을 바꿔 입고 다시 나타난다. 숨겨진 욕구와 기대가 충족될 때까지, 불안과 공포가 줄어들고 해소될 때까지 재생산된다. 유언비어의 속성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김대중정권은 정권 출범 1년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언비어의 허위와 병리를 한탄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물론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경제를 회복하고 편중인사 논란을 잠재워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회복은 어떤 야당인사의 선동대로 ‘올해 안에 경제가 회복되면 손에 불을 붙이라’고 할 정도로 지난한 과제고, 편중인사 논란 역시 공직인사가 전정권 수준으로 되돌아가지 않고는 좀처럼 해소할 길이 없어 보인다. 거기다 지역감정에 열심히 기름을 부어대는 ‘철없는’ 정치인들이 있다.

▼정치개혁으로 풀어야 ▼

이것이 현실이다. 인내와 성의로 차근차근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사법적으로 대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확고한 개혁추진을 통해 정도(正道)로 풀어야 한다. 여당의 두 ‘정치 9단’이 풀지 못한다면 정치 9단이라고 할 수도 없다. 궁극적으로는 지역할거주의 정치구조를 청산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해답은 정치개혁에 있다. 정치를 개혁하지 않고는 경제도 못 살리고 지역화합도 이뤄낼 수 없다. 그런 뜻에서라면 ‘지역 허물기’ 정계개편도 여러 모로 신중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수 있다. 권력놀음이 아니라는 분명한 전제 위에서.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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