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식씨 증언내용]『97년초 이미 외환위기』

  • 입력 1999년 1월 26일 19시 46분


―IMF로 간다는 것을 최종 결심한 날은….

“(97년11월) 19일 IMF행을 발표하는 것 자체는 주초에 이미 알고 있었다. 17일경 쯤이다.”

―환율 등 위기상황을 미연에 대처하지 못한 것은 증인한테도 엄청난 책임이 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11월의 상황은 예측을 전혀 못한 상황이다.”

―11월19일 경질됐을 때 후임 부총리에게 제대로 인수인계를 했느냐.

“경질을 통보받고 김용태청와대비서실장에게 후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이임식을 하고 청사를 떠났다.”

―신임부총리가 IMF행을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증인의 생각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볼 때 IMF와 협의가 됐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19일 발표를 안했더라도 IMF가 그걸 가지고 시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임창열부총리의 발표내용 자체가 IMF도움없이도 풀어나갈 수 있다는 취지였고 그것이 16일 캉드쉬와 합의한 것을 번복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데 문제가 있다.”

―11월에 증인이 지방으로 돌며 지방경제활성화 강연을 했는데 이것은 당시 대통령선거를 지원하기 위한 것 아니냐.

“선거용이 아니다. 내용도 지방경제활성화 강연이 아니라 구조개혁을 하자는 것이었다.”

―97년3월11일 한국은행에서 외환위기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는데 증인은 왜 그때 안이하게 대처했는가.

“안이하게 대처한 것이 아니다. 협의를 하고 3월16일 대책을 발표했고 31일에도 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 보고에서는 IMF에 대해 얘기 안했다. 보고서 한줄에 ‘모든 것이 안될 때 가야 한다’고….”

―증인은 변명을 하고 있다. 증인 스스로 보고서를 읽고 외환 위기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심각하구나 하고 절실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대응하지 않았다.

“대응했다고 말씀드렸다”

―가장 큰 책임은 김영삼대통령과 증인이다.

“경제를 맡은 사람으로써 책임 통감한다.”

―10월27일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증인은 펀더멘털(기초여건)이 튼튼하니까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는가.

“그때 우리가 돈을 빌리려고 해도 국제시장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돈을 빌릴 수 있겠느냐 하는 쪽으로 백방으로 머리를 썼다.”

―IMF행이 천재와 인재중 어느쪽이라고 생각하나.

“제대로 했으면, 건실했으면 막을 수 있었다.”

―당시 여러가지 경제지표를 보면 위기상황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97년3월초 입각했을 때 이미 위기상황에 가 있었다. 주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권 말기의 어려운 때 왜 입각을 하느냐고 만류했지만 저 나름대로는 일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 입각한 것이다.”

―한국경제에 대해 구조적 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그러면 펀더멘털은 뭔가.

“외환위기라는 용어에 혼돈이 있다. 외환위기라면 IMF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고 외환 사정이 어려운 것은 이미 3월부터였다.”

―IMF로 끝까지 가지 않으려고 한 것 아니냐.

“다른 방법을 써서 안갈 수 있다면 안가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IMF가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라스트 리조트다. 그래도 안가는 길을 찾아보는 것이 최선이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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