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날 개천절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광주고보생 등의 울분에 찬 가두시위로 본격화됐으며 바로 직전인 10월30일에 있었던 광주∼나주 통학열차에서의 여학생 희롱 및 집단충돌사건이 그 도화선으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에서 타오른 항거의 불길은 인근 전남지역에 이어 그해 12월초에는 서울의 대규모 학생시위로 번져 갔으며 개성 인천 원산 평양 함흥 공주 등 전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돼 나갔다. 투쟁형태도 시험거부 동맹휴학 격문살포 가두시위 등 다양한 것이었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에는 모두 1백94개 학교(전문학교 4곳, 중등학교 1백36곳, 보통학교 54곳)에서 학생 5만4천여명이 참가함으로써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으로 광주에서만 2백60여명이 구속됐고 그 가운데 보안법관련자 49명, 성진회(醒進會)관련자 38명, 독서회(讀書會)관련자 90명, 소녀회(少女會)관련자 11명 등 모두 1백70여명이 재판에 회부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근저에는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정책과 세계대공황(1929년), 1920년대 이후 성장해 온 노동 농민 학생운동의 역량 등 복합적인 변수가 작용했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그러나 해방 50년을 넘기고 이 운동이 발발한 지 70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도 그에 걸맞은 역사적 평가와 기념사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게 현실.
특히 우리의 어정쩡한 역사교육은 ‘광주―나주 통학열차에서의 여학생 댕기희롱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한일 학생간 충돌사건’정도로만 이 사건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53년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1월 3일이 ‘학생의 날’로 지정됐으나 73년 유신정권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폐지된 일은 이같은 ‘부당한 대우’를 실증하는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더욱이 84년 ‘학생의 날’이 부활되기는 했으나 국가적 재평가작업은 이뤄지지 않은 채 해마다 학교별로 기념식을 치르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80년 이후 제기된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영향과 지도아래 치밀하게 계획된 조직활동의 성과’라는 일각의 주장도 일반인들에게는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하나의 ‘가설’로 남아 있었다.
그전까지 우리 사학계는 일부의 사회주의 영향설에 대해 ‘민족운동을 공산주의운동으로 몰아붙여 탄압하려 했던 일제의 상투적인 수법이 기록에 남아있는 탓’이라는 논리로 핵심은 피해 왔던 것이 사실.
따라서 96년 이후 ‘국사’교과서에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은 청년,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널리 파급되면서 사회 경제운동을 활성화시키기도 했다’는 수준의 표현이 등장한 것은 그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여러 사료들은 또 당시 지식인 그룹이 ‘식민지에서 민족해방운동과 계급해방운동은 분리해서 볼 수 없으며 협동전선을 통한 민족해방운동이 최우선 과제’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20년대 후반에 탄생한 신간회(新幹會·1927년)가 ‘좌우합작형’이었다는 사실은 이 공감대를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당시 이 운동의 주도단체인 성진회 독서회 등 회원의 상당수가 신간회 등 외부단체와 연계됐거나 중복되는 인물들이고 △이 운동의 전국 확산과정에서도 이들 단체의 역할이 인정된다는 점 등에서 ‘좌우합작형 거사’로 기록될 만하다. 특히 성진회와 독서회는 광주지역의 학생운동을 주도한 학생비밀결사로서 그 조직적 역량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그러나 이 두 단체의 주도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현장에서 이 운동을 이끌었던 장재성(張載性)의 경우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 사회주의계열에 기울어지는 일부 구성원들의 성향과 이력으로 인해 국사교과서에는 아직 그 활약상이 올라 있지 않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사단법인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간)의 집필실무를 맡았던 광주대 고영진(高英津·한국사상사)교수는 “이 운동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남북분단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역대정권의 비민주성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고교수는 “당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는 물론 왕정복고주의 무정부주의까지 다양한 사상이 혼재했고 서로 교류가 자유로웠던 시기였다”며 “이를 무시한 채 냉전의 잣대만으로 흑백을 가리려 했던 것이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광주〓김 권기자〉goqu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