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주년 기획]되돌아본 69년 3選개헌

  • 입력 1999년 3월 25일 19시 27분


97년 12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에 편입된 이후 사회 일각에서는 과거 고도성장 시대에 대한 향수에 젖어 고(故)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었다.

박대통령이 정치적으로는 장기집권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지만 초유의 경제위기에 직면한 일부 국민은 ‘좋았던 옛시절’을 그리며 경제발전의 틀을 닦은 그를 기렸다.

그러나 IMF체제가 빚어낸 ‘박정희 신드롬’에 편승한 사람들조차도 “그가 독재만 안했더라면 더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됐을 것”이라는 역사의 가정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이렇게 볼 때 박대통령이 69년 장기집권의 길로 나서기 위해 단행한 ‘3선개헌’은 국민에게는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던 셈이다.

한국 헌정사에 커다란 굴곡으로 기록된 3선개헌에 관한 가장 큰 아쉬움은 역시 막을 수 있는 개헌을 막지 못했다는데 있다.

당시 공화당 의원이었던 이만섭(李萬燮)국민회의상임고문은 “만일 당내에서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끝까지 똘똘 뭉쳤더라면 3선개헌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개헌론이 처음 제기될 무렵 개헌추진세력이 개헌안의 국회 통과에 필요한 재적의원 3분의 2에 못미쳤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해 9월14일 공화당이 개헌안을 변칙처리할 때 국회의원 총수는 1백71명으로 개헌안 처리를 위해선 1백14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이때 개헌안에 서명한 의원 수는 공화당 1백7명과 정우회(政友會) 11명 등 1백18명으로 개헌 통과선보다 겨우 4명이 많았다.

물론 실제로 날치기로 개헌안을 통과시킬 때 일부 무소속의원이 가세해 1백22명이 찬성했지만 어쨌든 공화당 단독으로는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개헌안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공화당 내에 상당한 반대 의견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개헌안 처리를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셈이다.

실제로 개헌안의 국회 처리 2개월 전인 그해 7월 당의장출신인 정구영(鄭求瑛)의원 등이 박대통령에게 3선개헌 반대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작성한 건의서에는 소속 의원 40명이 서명했었다.

이 건의서는 결국 전달되지 못했지만 이에 앞서 4월8일 권오병(權五柄)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때 공화당에서 3선개헌에 반대하는 예춘호(芮春浩)의원 등 40여명이 당론을 어기고 찬성표를 던져 해임안을 통과시킨 사실은 개헌반대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끝까지 개헌반대를 관철하지 못했을까. 이는 박대통령의 집요한 설득과 김형욱(金炯旭)중앙정보부장의 협박 등 총체적인 ‘공작정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공화당내 개헌반대파들은 김종필(金鍾泌)씨를 중심으로 결속이 돼 있었다. 3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박대통령이 재선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 71년 선거에서는 김씨를 내세우겠다는 게 이들의 구상이었다.

김씨 역시 처음엔 3선개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엔 찬성 쪽으로 입장을 바꿔 계파의원들에게도 개헌안을 지지해줄 것을 종용했다. 보스의 ‘훼절’은 개헌반대세력의 전열 약화를 초래했다.

박대통령은 물론 김형욱중앙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청와대비서실장과 공화당의 길재호(吉在號)사무총장 김성곤(金成坤)재정위원장 백남억(白南檍)정책위의장 등이 나서서 조직적으로 개헌찬성을 설득했다.

개헌에 반대하던 야권과 언론에는 탄압과 회유의 손길이 뻗쳤다. 김영삼(金泳三)신민당원내총무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초산테러’를 당한 것은 그해 6월10일의 일이었다.

김형욱은 뒷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중앙정보부 내에 개헌작업에 필요한 특별기구를 만들고…신민당의 조흥만(曺興滿) 성낙현(成樂絃) 연주흠(延周欽) 임갑수(林甲守) 한통숙(韓痛淑)의원을 개헌지지로 바꾸었다”며 “그 과정에서 그들 5명에게 적지않은 정치자금이 넘어간 것은 사실”이라고 대야(對野)공작을 토로했다.

그는 또 “언론을 길들이기 위해 각개격파의 전법을 사용했으나…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낸 이사 천관우(千寬宇)만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며 “내가 상대했던 언론인 중 촌지공세를 거부한 사람은 오직 천관우 하나 뿐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그는 3선개헌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직후 중앙정보부장직에서 교체돼 결국 ‘토사구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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