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남북 당국자 회담을 받아들인 것만으로 폐쇄체제의 옷을 벗기 시작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최근 북한을 둘러싼 동북아 정세의 큰 틀에서 분석하면 상당한 진전이다. 우선 미국은 핵 의혹이 사실상 해소됐다는 판단 아래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여러 방면에서 추진하려는 기세이다. 중국은 미국의 그러한 움직임이 북한을 중국의 영향권에서 떼내 미국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려는 계산에서 나왔다고 읽으면서 김일성(金日成)이 사망한 뒤 어느 정도 멀어졌던 북한과의 관계를 복원시키고 있다.
이러한 동북아 국제관계의 역동적 흐름에 북한이 편승하기 시작했으며 그 일환으로 남북대화에 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볼 때 북한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기는 이르겠으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점에 ‘국민의 정부’ 내부에서 생각지도 않은 옷 문제가 터져 ‘의혹(衣惑)’으로 확대된 채 이렇게 나라 전체를 뒤흔들 줄이야.
이 대목에서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외교적 업적이 국내적 실정(失政)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미국 닉슨 전 대통령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닉슨은 소련과의 긴장완화, 중국과의 관계개선, 베트남전의 종결 등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외교적 업적을 쌓았으며, 국민은 그 공로를 인정해 압도적으로 재선시켜 주었다. 그러나 제2기에 워터게이트 추문이 일어나자 국민은 등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탄핵으로 몰고가 그는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은 커다란 외교적 치적보다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해도 내정의 문란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특히 무슨 속임수가 개입됐다는 의심이 확산될 때는 여론의 대해(大海)에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일게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벌써 1주일 넘게 들끊는 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고급 옷 로비’사건을 정부는 큰 눈으로 다시 살펴야 한다. 이와 관련해 93년 여름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중고품 볼보자동차’ 사건을 되돌아보자. 이 사건은 당시 여당인 보수당 소속 하원 의원이면서 북아일랜드 담당 부장관인 마이클 메이츠의 별거중인 부인이 메이츠의 사업가 친구로부터 보름 동안 중고품 볼보 승용차를 무료로 빌려 탔던 데서 시작됐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좋지 않게 보던 언론은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 근거는 “장관들, 부장관들, 차관들은 물론 그들의 가족은 자신들을 어떤 의무에 묶어 놓을 것 같은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장관 부장관 차관의 행동 강령’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메이저 총리는 메이츠 부인의 행동이 이 강령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메이츠를 감쌌다. 그러나 메이츠가 자신에게 정치자금을 헌금한 한 외국 기업인의 불법행위를 감싸준 추문이 터지면서 여론이 더욱 나빠지자 마침내 물러났다.
이번 기회에 우리도 ‘장차관 등 고위 공직자의 행동 강령’을 마련하고 엄격히 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한편으로 ‘카이사르의 아내’라는 말을 되새겨봄이 좋겠다. 고대 로마의 실력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내가 부정(不貞)의 의혹을 받자 “카이사르의 아내는 의심받는 것만으로도 카이사르의 아내로서의 자격을 잃는다”며 내쫓았다. 이때부터 ‘카이사르의 아내’라는 말은 ‘결코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으로 바뀌어 쓰인다. 국무위원의 부인이라면 ‘카이사르의 아내’가 돼야 하지 않을까.“높은 자리는 과녁과 같아 누구나 거기를 향해 활을 쏘고자 하니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정약용(丁若鏞)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김학준〈본사논설고문·인천대 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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