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3일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중국 베이징(北京) 차관급회담의 개최(21일)에 합의한 지 얼마 안돼 이처럼 심각한 대치상황이 조성돼 남북관계의 좌표를 읽기가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북한의 도발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대북 접근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점도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그동안 북한의 무력도발을 불용하되 대북 화해 협력 교류 정책은 남북관계의 기복과 관계없이 일관되게 추진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김영삼(金泳三)정부 시절 남북관계가 최악의 단절 상태에 있었던 것도 대북정책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중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에 따른 정책이었다.
정부는 지난해 6월 정주영(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첫 방북했을 때 북한 잠수정의 동해 침투사건이 발생했지만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교류협력을 계속 추진했기 때문에 금강산관광사업이 실현되는 등 일관된 대북 포용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다고 내세워왔다.
그러나 남북간에 포격이 오가는 불상사가 발생한 지금 정부가 과연 종전처럼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고려대 북한학과의 유호열(柳浩烈)교수는 “대북 포용정책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지만 북한이 우리의 선의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데는 정부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한다.
즉,‘무력도발 불용’의 원칙만 내세울 뿐 실제로 북한에 단호한 안보의지를 보여주지 못한 것과 상호주의 원칙을 포기한 대북 비료제공, 북한의 NLL 침범에 대한 미온적인 초기대응 등이 이번 사태를 초래하게 됐다는 것.
어쨌든 정부는 앞으로 일관성 있는 대북정책을 계속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완급조절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남북대화
21일 열릴 예정인 남북차관급회담은 당초 남북이 합의한 대로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서신교환 상봉과 같은 구체적인 교류방안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회담이 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양측간에 교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고 화해협력을 지향한다는 게 현실과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 회담이 이번 사태 후 처음 열리는 남북 당국간 회담인만큼 양측간에는 사태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개연성이 크다.
이번 회담을 시작으로 차관급회담을 정례화하고 올 하반기에 장관 총리급의 고위급회담을 열겠다는 정부의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방북자 안전
15일 현재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우리 국민은 모두 1970명인 것으로 통일부는 파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금강산관광객과 승무원 등 금강산관광 사업에 관련된 인원이 1649명, 함경남도 신포지구의 경수로 건설인력 203명, 대북 비료지원 인원 50명, 경협 관계자 23명 등이다.
북한은 이들에 대해선 당국 명의로 신변안전과 무사귀환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남북관계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이 이들을 ‘볼모’로 잡을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한다. 따라서 정부는 방북자의 안전 확보에 최대한 신경을 쓸 계획이다. 경우에 따라선 방북자의 조기귀환과 추가방북 통제 등의 조치가 취해질 수도 있다.
▽대북 비료지원
정부는 북한과의 베이징 비공개접촉을 통해 북한에 비료 20만t을 다음달말까지 제공하되 이중 10만t은 차관급 회담 전인 20일까지 전달키로 합의한 상태다. 이에 따라 15일까지 모두 2만1000t의 비료가 이미 북한에 전달됐다.
북한은 특히 7일 북한 경비정이 처음 북방한계선을 침범해 남북간에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도 비료수송선이 해주항을 오가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정부는 14일 여수항을 출항, 15일 오후7시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남포항으로 입항할 예정이던 6번째 비료수송선 갈리나Ⅲ호의 운항을 중단시켰다.
이 배가 교전사태가 벌어졌던 수역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양측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 비료지원은 계속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기흥기자〉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