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칼럼]당신들 무슨 더러운 짓 하는가?

  • 입력 1999년 11월 26일 18시 48분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차리즘이 붕괴된 뒤 혁명세력은 즉시 제정 러시아의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방대한 정보철을 접수하고 혁명가로 위장한 채 사회주의 진영에 침투했던 밀정들의 명단을 파악했다. 거기엔 레닌의 측근이던 말리노프스키를 비롯한 쟁쟁한 볼셰비키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마침내 총살됐다. 92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소련정보기관의 많은 비밀문서들이 공개됨과 아울러 지난날 은폐됐던 사건들의 진상이 밝혀졌을 때 그 파장은 일본 공산주의운동의 신화적 존재이던 노사카 산조(野坂參三)에게까지 미쳤다. ‘일본공산당의 덴노(天皇)’라는 숭앙 속에 100세의 수를 누린 직후의 그가 사실은 ‘3중 스파이’였음을 보여준 비밀문건들이 공개됐기에 출당당한 뒤 쓸쓸히 죽어야 했다.

◆권력에 의해 진실은폐

남의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세상엔 비밀이 없다는 가르침을 우리는 최근 몇 달 사이에 이 땅에서도 계속해서 실감한다.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49년 만에, 미군과 국군에 의한 비무장지대에서의 고엽제살포사건이 30년 만에 공개됐다.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의 박처원(朴處源) 전 치안감에게 입막음을 위해 치안본부장의 주선아래 ‘카지노 업계의 대부’로부터 10억원이 전달됐고, 그 돈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의 도피자금이 빠져나갔다는 사실도 10년 만에 공개됐다.

이처럼 권력에 의해 은폐됐던 진실이 밝혀지는 시대에, 그리하여 진실에 대해 새삼스레 외경심을 갖고 국정을 운영해야 할 이 시대에,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진실이 권력에 의해 여전히 은폐되는 모습을 본다. 언론문건사건과 옷로비사건이 그 대표적인 보기다. 언론문건사건은 결코 하나의 해프닝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권력이 부당한 방법으로 언론을 장악하려 했던 음모의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그런데도 본질은 가려진 채 유야무야 지나가고 있다. 옷로비사건에 이르러서는 본보가 단독보도한 ‘사직동팀 최종보고서’가 말해주듯 은폐와 조작의 짙은 그림자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고 이 보도가 나가면서 마침내 박주선(朴柱宣)청와대 법무비서관은 자신이 김태정(金泰政) 당시 검찰총장에게 문제의 문건을 넘겨 주었음을 실토하고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김전총장이 이 문건을 부인 연정희(延貞姬)씨에 넘겨주었고 연씨는 이것에 맞춰 관련자들과 말을 맞춘 과정의 출발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사법정의의 진행이 왜곡됐고 방해됐던 음모의 실체가 비로소 벗겨지기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관련자 의법처리를

미국 닉슨 공화당 행정부의 워터게이트사건은 반대당인 민주당 사무실을 도청했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을 은폐 조작하려 했던 데서 중대범죄화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막상 도청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백악관 참모들은 공작원들에게 입막음의 거액을 주었으며 증거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이 사실마저 드러났는데도 백악관은 계속해서 거짓말로 위기를 넘기려 했건만 여론이 들끓게 되자 마침내 문제의 참모들을 해임하고 특별검사를 임명하는 선으로까지 물러섰으나 그래도 수습이 되지 않아 결국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악화되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정부는 박비서관 한사람의 사표수리로 이 일을 끝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옷로비 수사에서 ‘검찰총장 부인 봐주기’를 위한 축소 은폐와 조작에 가담한 수사관들과 검사들을 포함한 관련자 모두, 그리고 대통령에게 허위보고한 관련자들에 대해서 과감히 의법처리해야 할 것이다.

여담을 덧붙인다. 워터게이트사건에 깊숙이 개입됐기에 결국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갔던 당시 검찰총장 존 미첼의 부인 마사는 남편의 주변에서 뭔가 범죄의 냄새가 나는 것을 느껴 “당신들 지금 무슨 더러운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지르며 사건의 악화를 막고자 했다. 우리의 경우는 고관 부인들의 로비성 옷쇼핑에서 비롯된 파동이 공권력에 의한 사건조작의 범죄로 확대됐고 마침내 이 정부의 도덕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기에 이르렀다. 오직 정부 스스로의 신속하면서도 정직한 고해와 엄정한 수사, 그리고 지위 고하를 막론한 관련자들의 의법처리만이 불신과 지탄의 전국민적 확산을 가라앉힐 수 있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 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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