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개인정보 불법입수 선거기획사 사전운동

  • 입력 2000년 2월 22일 19시 26분


4·13 총선을 앞두고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는 이른바 ‘선거기획사’ 가운데 상당수가 유권자의 신상 정보를 불법적으로 입수해 사전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본보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이들 기획사는 유권자 개인의 이름 주소 나이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뿐만 아니라 가장(세대주)의 출신 지역까지 담긴 정보를 ‘선거정보 브로커’들로부터 입수, 전화여론조사 등을 빙자해 특정 후보를 홍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법정 선거운동(3월 28일∼4월 12일)이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한달 이상 남았지만 정보브로커들과 결탁한 선거기획사들의 무분별한 전화 공세에 상당수 유권자들이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유권자 정보 유통 실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 선거기획사는 이달 초 정보브로커로부터 CD롬에 담겨 있는 서울 강남지역의 한 선거구 유권자 정보를 입수했다. 유권자 한명의 정보를 80원으로 계산해 이 회사가 브로커에게 준 돈은 800만원.

CD롬에는 세대주별로 묶인 각 유권자의 이름 전화번호 주소와 세대주의 출신 지역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 기획사는 요즘 이 정보를 이용해 자신들이 홍보대행을 맡은 출마예정자와 같은 지역 출신 유권자들에게 여론조사를 가장한 전화를 걸어 후보를 선전하고 있다.

이 기획사 직원 A씨는 “아직 지역감정이 강한 우리나라의 실정상 유권자들이 부모의 지역정서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아 세대주의 출신 지역이 드러나 있는 이 정보가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선거기획사처럼 법인 신고도 하지 않고 선거 전 3,4개월만 잠시 활동하다 사라지는 소규모 선거기획사는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150여개나 된다고 A씨는 말했다.

이들은 기획사 이름도 내걸지 않고 사무실만 임대해 ‘알음알음으로’ 총선 후보자들과 접촉하고 있다.

이들이 총선 후보자들에게 받는 홍보비는 유권자 샘플 한명당 4000∼6000원. 미디어리서치 갤럽 등 공식 여론조사기관들이 받는 샘플당 1만∼1만2000원의 30∼60% 수준이다.

▼브로커의 정보 취득 실태▼

선거정보 브로커가 유권자 정보를 만드는 기초자료는 96년 15대 총선 당시 후보자들이 가지고 있던 지역구별 선거인 명부. 유권자의 이름 주소 주민등록번호 세대주가 적혀 있는 이 명부는 각 지방자치단체가 선거운동 개시일에 후보들에게만 출력을 할 수 없는 컴퓨터파일 형태로 제공한 것.

브로커들은 개인적인 경로를 통해 입수한 유권자 명부와 전화국에서 빼낸 전화 사용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를 대조해 개별 유권자에 관한 정보를 작성한다.

서울지역에서 활동하는 한 브로커는 “선거인 명부는 전직 선거 운동원, 전화 사용자의 신상 정보는 주로 전화국 전직 직원들을 통해 빼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15대 총선 이후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 유권자가 있을 수 있으므로 백화점 카드사 심부름센터 등에서도 개인 신상정보를 입수해 전화 사용자의 개인정보와 대조해 조정한다는 게 또 다른 브로커의 설명이다.

브로커들은 주민의 출신 지역에 따라 부여되는 주민등록번호의 뒷부분 숫자를 이용해 유권자의 출신지역을 동(洞)단위까지 알아낸다.

공무원 보안업무 규정에 따르면 주민등록번호의 출신지역별 코드는 주민등록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업무 담당자 외에는 절대 알 수 없도록 돼 있다. 그러나 브로커들 사이에는 이미 ‘비밀’이 아니다. 브로커 김모씨는 “동사무소에 근무했던 전직 공무원을 통해 쉽게 출신지역별 코드를 알아냈다”고 말했다.

한 브로커는 “전국 273개 선거구 전체의 유권자 개인 신상정보가 담긴 파일을 만들어 수천만원씩 받고 기획사에 넘기는 전문 브로커 조직도 있다”고 전했다.

▼사전선거 운동▼

서울 강남에 사는 주부 이재현씨(31)는 최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려오는 후보자 여론조사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전화를 건 측에서는 유명 여론조사기관과 비슷한 이름을 대며 “00후보가 지역구 발전을 위해 00계획을 세웠는데 이같은 내용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방식을 쓰고 있다는 것.

소규모 기획사들의 이같은 전화공세 때문에 최근 공식 여론조사기관인 미디어리서치 한국갤럽 등에는 항의성 문의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미디어리서치 사회조사실 김지연(金知演)과장은 “이번 달 들어서만 개인적으로 항의전화를 30여통이나 받았다”며 “신진 인사들이 정치권에 대규모로 진입하면서 이들을 홍보하는 선거기획사가 부쩍 늘었고 이들이 공식 여론조사기관의 이름을 도용해 사전선거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전화 여론조사를 빙자한 사전선거운동은 조사 기관을 알아내기 힘들어 확증이 있는 유권자들의 신고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라며 “유권자의 개인신상 정보 유통에 대해서도 대책을 마련해 단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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