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에 대한 해석은 논자에 따라, 또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다. 이 때문에 누구나 수용하고 승복할 수 있는 ‘정답’을 찾기는 난제 중 난제다. 다만 객관적으로 나타난 대선 때 표의 흐름과 당시 정치인들의 행태를 통해 접근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한국 헌정사에서 직선제 대선은 2,3(이승만·李承晩) 5,6,7(박정희·朴正熙) 13(노태우·盧泰愚) 14(김영삼·金泳三) 15대(김대중·金大中) 대선 등 모두 8번. 이 중 지역감정과 당락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정도의 대선은 박정희후보와 김대중후보가 맞붙었던 7대(71년) 대선이었다는 게 지배적 분석이다.
▼남북대결서 동서대결로▼
5·16쿠데타로 등장한 영남출신 박전대통령이 첫 출마한 5대(63년) 대선에서 충청출신 윤보선(尹潽善)전대통령을 15만표 차로 이길 때만 해도 표의 동서 분열, 또는 양극화현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영호남과 중부 이북의 이른바 ‘남북대결’ 양상이 펼쳐졌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대결이 펼쳐진 67년 6대 대선 때 박전대통령은 영남에서 70% 이상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하지만 이 때도 영호남표의 양극화 현상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몰표 주자" 부추기기 시작▼
이런 표의 흐름이 확연히 달라진 게 71년 대선. 박전대통령과 호남출신 김대중후보가 맞붙은 이 선거에서 박전대통령을 지지한 영남표는 평균 72%로 호남표 36%의 두배였다. 이 때 공화당의 이효상(李孝祥)국회의장은 “대구 경북에서 몰표를 쏟아부어 기어이 당선시키자.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는 등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지역감정조장이 심각해지자 김대중후보는 선거 막바지 대구 유세에서 “63년 선거 때 박대통령이 15만표 차로 이겼는데 이것은 박대통령이 전라도에서 40만표를 이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1200년전 백제 신라시대로 돌아갈 것인가. 공화당의 망국적인 더러운 선거전에 좌우되지 말고 양심적으로 투표하자”고 호소했다.
반면 박정희후보는 광주 유세에서 “일부 야당인사들이 혈연 지연 등 전근대적인 요인을 악용해 지역감정을 선동하고 있다”고 지역감정 선동의 책임을 김대중후보측에 돌렸다. 이런 당시 공화당의 시각이 JP의 ‘지역감정 DJ 책임론’에 스며있는 것으로 보인다.
▼87년 대선때 극단적 악용▼
정치인들의 지역감정 악용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유신과 군부통치의 긴 터널을 지나 16년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87년 13대 대선. 이른바 ‘1노 3김’이 대결을 펼쳤던 이 선거에서 당시 노태우후보는 대구 경북에서 각각 69.7%, 64.8%를, 김영삼후보는 부산 경남에서 56%, 51.3%를, 김대중후보는 광주 전남북에서 94.4%, 90.3% ,83.5%를, 김종필후보는 충남에서 45%를 득표했다. 이 때 YS가 부산 경남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득표율을 기록한 것도 DJ의 당선을 저지하려는 유권자들이 노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했다.
이런 현상은 92년 14대 대선으로 이어져 당시 민자당 김영삼후보는 영남권에서 70% 이상을, 민주당 김대중후보는 호남에서 90%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김동철·공종식기자> eastph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