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영수회담/의미-초점]신뢰구축 틀 마련

  • 입력 2000년 4월 24일 19시 04분


“문제는 이제부터다.”

24일 13개월 만에 이뤄진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 간의 영수회담이 끝난 뒤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던진 말이다. 영수회담 합의보다 앞으로의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실 김대통령과 이총재가 이날 발표한 합의문은 국리민복(國利民福)에 관한 한 거의 모든 내용을 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대통합’의 대원칙에 합의했고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초당적 협력, ‘상생(相生)의 정치’는 물론 구제역과 산불 등 민생현안까지 언급했다.

이번 회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일단 과거 2년여 동안 대립과 파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여야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신뢰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례에 비추어보면 이는 어디까지나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편이 옳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두 차례의 단독영수회담을 통해 이번 회담에 못지않은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발표문을 내놓았으나 이후의 상황은 오히려 반대쪽으로 귀결됐다.

따라서 이번 여야 영수회담은 새로운 정국 환경 조성을 위한 서곡(序曲)일 뿐, 그 성과에 대해 궁극적 평가를 내리려면 다소 시일이 더 필요한 게 사실이다.

<최영묵기자>ymook@donga.com

▼초점1/정치복원 공조▼

24일 여야영수회담은 '정치복원'을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그 일차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회담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국회의 권한을 존중하겠다" 는 의사를 확실히 했다. 이는 "선거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에 따라… 신뢰를 갖고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하지 않는다"는 발표문을 통해 가시화 돼 있다.

정권교체 후 지금까지 김대통령은 야당의원 영입을 통한 정계개편, 정치권 사정 등을 통해 정치 현실에 적극적인 '개입 의지'를 보여온 게 사실. 그러나 '4·13' 총선 이후의 상황은 김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쪽으로 변화됐다는 것이 여권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이에 대해 이회창 한나라당총재는 '국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화답'을 보냈다. '여야가 정책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건전한 의회 정치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공동 노력키로' 한 합의가 그 것. 이는 지난 2년간 한나라당이 '발목잡기'와 '정쟁'에 치중했던 것 아니냐는 내부 '자성론'과도 일맥상통하는 셈.

여야 영수가 이날 '정치 복원'이라는 공통인식을 구체화할 조치로 '미래전략위원회' '여야 정책협의체' 설치 등 각론 합의를 이끌어 낸 것도 향후 여야 관계의 전도를 밝게하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회담은 당장의 현안인 16대국회 원구성에 대해 아무런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등 적지 않은 한계를 노정했다는 지적이다. 여권이 인위적 정계개편을 않는다는 합의사항 앞에 '신뢰를 갖고'라는 단서를 넣을 것을 고집, 관철시켰다는 후일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권에선 "즉각 신뢰가 상실되면 정계개편 상황도 달라지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이다.

<윤승모기자>ysmo@donga.com

▼초점2/정상회담 협력▼

여야 영수회담 공동발표문에 나타난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합의에는 일단 야당의 주장이 대폭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국가안보와 대한민국의 정체성 고수 △경제협력에서 상호주의 원칙 고수 △국민 부담에 대한 국회 동의 등은 한나라당이 주장해온 항목들.

하지만 문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나라당의 뜻이 반드시 관철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대북경협 등에서 해석을 달리할 소지가 여전하기 때문.

우선 한나라당은 ‘주고받기’식의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반면 여권이 주장하는 상호주의는 당장은 반대급부가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파급효과를 낼 수 있는 대북조치도 허용해야 한다는 ‘신축적 상호주의’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실제적인 대북경협 및 사회간접자본(SOC) 지원이 이루어질 때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할 소지를 남긴 대목인 셈이다.

‘국회의 동의를 요하는 국민의 부담’이라는 용어도 애매하다. 헌법 60조는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의 체결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북경협 및 지원을 위한 협정 등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맺는 ‘조약’인지가 우선 분명치 않다. 실제 대규모 대북경협 사업의 하나인 경수로 지원사업은 별다른 국회의 동의나 견제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근본적인 해석 차이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초당적인 지지’라는 합의에도 불구하고 전도를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다만 정상회담 성과가 조기에 가시화돼 여론의 지지를 받을 경우 야당이 제기한 조건들이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

▼초점3/선거사범 수사▼

한나라당이 영수회담을 앞두고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사안은 인위적 정계개편과 16대 총선 선거사범 수사문제였다. 이는 여권이 선거사범 수사를 빌미로 야당의원을 압박해 인위적 정계개편을 시도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총재가 이날 회담에서 “선거사범 처리는 반드시 공정하고 엄정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 것도 이같은 상황인식에 따른 것. 이에 대해 김대통령은 “분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김대통령은 병무비리 수사에 대해서도 “선거에 이용하지 않았고 할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일단 김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으로 미루어 여권이 드러내놓고 선거법 위반 혐의가 있는 야당 당선자들을 상대로 ‘편파수사’를 하거나 이를 이용해 일부 당선자들을 여당으로 데려가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병무비리 수사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러면서도 한나라당은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김대통령이 편파수사 시비가 일지 않도록 민주당 당선자들에 대한 수사도 철저하게 해 ‘명분’을 얻고 그 명분 아래 한나라당 당선자들에 대한 수사도 강도 높게 진행, 대야(對野) 압박의 여지를 확보하려할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 이날 회담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선거사범과 병무비리 수사과정에서 여야 간에 편파수사 시비가 다시 일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가 여권에 의한 극심한 금권 관권선거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청와대와 민주당은 “가장 깨끗한 선거였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잠재적 마찰 요인이다.

<김차수기자>kimc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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