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정상회담]김학준씨-獨 마이어총장 대담

  • 입력 2000년 5월 14일 19시 29분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과거 동서독 정상회담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독일 훔볼트대의 한스 마이어총장은 "인내와 신뢰"라고 말했다. 회담 한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기 때뭉에 서로 믿고 인내하면서 쉬운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 김학준 인천대총장이 그로부터 동서독 정상회담의 교훈을 들어보았다.》

▽마이어 총장〓동서독 정상회담은 70년 3월부터 90년 10월의 통독까지 20년에 걸쳐 아홉차례 열렸습니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의 개최가 곧바로 통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이 정상회담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만 해도 성공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경우 1차회담과 2차회담 모두 가시적 성과가 없었습니다. 동서독 국민은 모두 열기에 휩싸였으나 회담장의 분위기는 냉랭했습니다. 다음 회담을 언제 어디서 열기로 한다는 것 하나만 겨우 합의했을 뿐이었어요.

그러나 양독의 지도자들과 국민 모두 인내심을 갖고 한걸음 두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끈기가 중요합니다. 특히 지도자의 신념이 중요하지요. 1차회담을 성사시켰을 때 사회민주당 당수이던 브란트 서독총리는 우파인 기독교민주당으로부터는 물론 우익언론과 우익세력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국가가 아닌 공산주의집단인 동독을 독일의 유일합법국가인 서독이 왜 상대하느냐"는 게 비난의 핵심이었어요. 그러나 브란트의 신념은 확고했습니다.

그는 동독을 협상의 대상으로 삼아 동서독 관계를 대결관계로부터 협력관계로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통독의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반대세력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하게 지적돼야 할 것은 실무회담의 중요성이에요. 1, 2차 회담 모두 아무런 합의점을 끌어내지 못했으나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접촉과 대화가 폭넓게 계속됐습니다. 여기서는 실용주의 정신에 입각해 어려운 문제들은 제쳐놓고 쉬운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김총장〓동서독 정상회담이 남긴 교훈으로 특히 무엇을 지적하고자 하십니까.

▽마이어 총장〓'상대방 이해하기와 신뢰쌓기'입니다. 정상의 수준에서 상대방을 이해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는 일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동서독 정상회담은 가르쳐 주었어요.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상대방이 우리 쪽에 갖고 있는 인식은 정확한 것인지, 상대방은 우리 쪽의 그 어느 것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가, 상대방은 과연 이 회담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알아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요.

동서독 정상들은 거듭된 회담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과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김총장〓그 지적은 중요합니다. 지난날 미국과 소련이 긴장완화(데탕트)를 지향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총리, 그리고 이어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총리 사이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는데, 이 회담들은 상대방 국가와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선입견과 편견을 고정시키기도 하며, 그리하여 두 나라의 관계를 후퇴시키기도 했어요. 이러한 맥락에서 남북정상회담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화제는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오히려 공통되는 주제를 자주 의제 또는 화제로 등장시키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마이어 총장〓동감입니다. 공통되는 주제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해도 처음엔 다투게 되고 그래서 협상이 부진하게 되는 만큼,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과 화제에 대해서는 정상들 사이에서는 피하는 것이 좋아요. 잘못됐던 점들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공통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라고 권하고자 합니다.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거나 자극하는 일은 서로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김총장〓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문제가 이제 남북의 한민족의 자주적 역량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문제는 지난날의 독일문제처럼 국제적 성격을 많이 갖고 있음이 사실이며 그러므로 국제사회에서의 지지와 협력이 중요해요. 특히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이른바 4강의 이해와 성원이 요청됩니다. 다행히 이들은 남북정상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어떠했나요.

▽마이어 총장〓당시 영국총리 대처의 회고록에 나왔듯이 유럽의 주변국가들은 독일의 통일가능성이 구체적으로 보이니까 견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선 미국이 긍정적으로 움직여 주었습니다.

또 통독의 가능성에 대해 가장 심하게 반대하던 소련이 이번에는 긍정적으로 돌아섰던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1972년12월에 동서독기본관계협정이 맺어졌을 때도 소련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배후에서 도와주었는데, 이 도움을 얻어내기 위해 서독 브란트 총리의 보좌관 에곤 바가 끈질긴 설득외교를 폈습니다.

한국은 주변국가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한반도의 안정과 번영에 대해서는 물론 동아시아, 그리고 나아가 세계의 안정과 번영에 대해서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메시지를 설득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신뢰예요. 한국정부의 말을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변국가들에 주어야 합니다.

서독은 서독정부의 대외정책과 통일정책을 믿게하기 위해 참으로 오랫동안 노력했습니다. 대외적으로 약속한 것을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꼭 지키고자 노력했지요.

▽김총장〓통독 이후의 독일상황을, 특히 옛 동독사람들의 심리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것이 장차 남북한관계에 어떤 암시를 줄까요.

▽마이어 총장〓서독 사람들은 통독이 되면 동독 사람들이 쉽게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에 익숙해지리라고 믿었어요. 그러나 그 전제가 틀렸음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옛 동독 사람들이 수십년 동안 가져온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관을 쉽게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남북한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훨씬 더 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긴 안목에서 심리적 조정을 꾀하기 바랍니다. 절대로 서두르지 마세요. 그러한 맥락에서 남북한 사이에 정보교환이 단계적으로 폭넓게 이뤄지기 바랍니다.

<정리〓김영식기자>spear@donga.com

▼한스 마이어 총장?▼

독일 수도 베를린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명문 훔볼트대 총장인 한스 마이어 교수(67)는 프라이부르크대와 뮌헨대에서 법학을 전공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본 대학에서 '지방자치제도와 재정헌법'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대학에서 '선거제도와 헌법질서'란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얻은 뒤 41세에 프랑크푸르트대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통독 직후 동베를린의 훔볼트대 구조조정회의 회장으로 임명돼 이 대학을 통일독일의 이념적 기준에 맞게끔 개편하는 작업을 이끌었으며 마침내 총장으로 임명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통독에 뒤따른 옛 동독 사람들의 심리적 충격과 재조정 등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김학준 인천대 총장 프로필▼

△미국 피츠버그대 정치학박사

△서울대 교수, 국회의원, 청와 대 대변인, 뮌헨대 객원교수

△현 동아일보 편집논설고문, 21세기평화재단 이사,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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