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그는 육사 6기로 군(軍) 생활을 하다 ‘5·16’ 직후 박정희(朴正熙)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초대 비서실장을 맡았다. 대한중석 사장 등을 거쳐 68년 기술자 29명만 데리고 포항에 내려가 불모지였던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철의 역사’를 일궈냈다.
▼YS와 악연으로 정치역정 좌절▼
그가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80년 국가보위 입법회의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 이후 11대와 13, 14, 15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의 정치역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90년 1월 집권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발탁돼 정치의 전면에 섰고 이어 3당 합당 후에는 민자당 최고위원이 됐지만 이때부터 YS와의 ‘악연’이 시작됐다.
14대 대통령선거 직전인 92년 중반부터 격화된 YS와의 갈등으로 그는 그 해 10월 민자당을 탈당했고 93년에는 세무조사를 받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는 급기야 일본으로 정치 유랑(流浪)길에 올랐다. 측근들은 지금도 “박총리가 일본에서 살 때 13평짜리 단칸방이 비좁아서 큰절을 하려면 소파를 옮겨놓고 해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만큼 외롭고 쓸쓸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그러나 재기했다. 97년 5월, 4년여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포항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정치적 명예회복과 함께 그는 뒤이은 대선국면에서 ‘DJP 연대’에 합류했고 이어 자민련 총재를 거쳐 국무총리가 됐다. 화려한 컴백이었다.
그는 총리시절 ‘경제총리’ ‘야전(野戰)총리’를 자임, 총리공관에 서류뭉치를 들고 가 새벽까지 검토하는 등 국정현안을 꼼꼼히 챙겼고 “정치인 시절보다 일은 무척 많아졌지만 마음은 가볍다”며 의욕을 과시해 왔다. 특히 총리 취임 후 자민련이 공동정권 탈퇴를 선언하는 바람에 정치적 입지가 어정쩡해진 상황 속에서도 ‘행정총리’로서 국정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말년의 중도하차 불명예▼
누구보다 명예와 원칙을 소중히 여긴다는 그였지만 10여년 전의 부동산 명의신탁 파문이 이 같은 ‘말년의 추락’을 가져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는 지금도 93년 자신에 대한 세무조사가 YS에 의한 ‘정치적 탄압’이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감정의 앙금이 채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지만 결국 이 세무조사가 말년에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철희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