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대응 음모론만 키워▼
음모론은 언제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촉발시키기도 하고 만족시키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이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시켜 암살하게 했다는 설이 한 사례이다. 정말 그랬을까? 1970년대 국내상황을 돌이켜 곰곰이 따져보면 궁정동의 비극은 충분히 예상되고 있었다. 시대적 상황은 강압적 긴급조치에 전적으로 매달려 잔명을 유지하던 유신체제의 철거를 강력히 요구했고, 그 요구의 함성이 부마사태로 폭발하는 가운데 마침내 권력핵심부의 분열로 이어지며 10·26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음모론보다 필연론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고 하겠다.
린다 김으로 상징되는 군 무기와 장비 로비사건, 그리고 TGV로 상징되는 고속전철 로비사건이 왜 이제 와서 떠들썩하게 불거졌느냐에 대해서도 음모론이 시중에 널리 퍼지고 있다. 음모론 제1설은 국내정치적 시각에서 제기된다. 두 사건 모두 김영삼(YS) 정부 때 진행됐던 사실에 주목해, 김대중(DJ) 정부에 지나치게 비판적인 YS의 발목을 잡고 YS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계략에서 나왔다는 해석이다. 특히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적 지지기반이 두터움을 북한에 보여주고 싶은 이 정권 책사(策士)들의 작품이라는 추론이다.
음모론 제2설은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제기된다. 남북정상회담이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등 미국으로서 매우 심각한 문제보다는 민족화해에 치중할 것으로 내다본 미국이 이미 확보한 정보들을 이렇게 저렇게 흘림으로써 견제구를 던진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 추론의 바탕에는 여권에도 로비에 관련된 인사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선 제2설과 관련해 필자는 믿지 않는다. 미국이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자기 나름으로 요구하는 사안이 있을 것이고 한국이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정부에 대한 견제의 수단으로 로비 사건을 새삼스레 터뜨렸을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추론이다. 1967년의 일이다. 세상을 놀라게 한 ‘동베를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고위 정보통’은 그 사건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의도적인 자료 제공으로 터졌다고 주장했다. 박대통령이 민선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곧 서독을 방문하고 서독을 발전 모델로 삼는 데 대해 쐐기를 박고자 서독 유학생들의 동베를린 또는 소련 방문에 관한 사진자료들을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넘겨줘 사건을 확대시킴으로써 한독관계를 악화시키고자 했다는 추론이었다. 그러나 뒷날 밝혀진 진상은 그 추론이 근거 없음을 보여주었다.
▼훗날 더 큰 폭발음나지 않도록▼
그렇다면 이 두 사건은 왜 불거졌을까? 필연론을 믿는 필자는 이 두 국책사업들에 천문학적 규모의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만큼 반드시 정권 차원에서 부정한 거래들이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아주 덮어질 수 없는, 말하자면 냄새가 계속 나는 사건들이기에 시도 때도 없이 터진다고 본다. 일반 시민들이 보기엔 이상스럽게도 DJ와 YS의 청와대 회동을 전후로 수사도 안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밀약이 있었다는 것인가? 그러나 뒷날이라도 이 사건들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폭발음을 낼 것이다. 박태준 총리의 부정도 결국 터지고 말았지 않았는가. 수사당국이 이미 관련 자료들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는 얘기가 신빙성 있게 퍼져 있다. 우물 슬쩍 넘어가려 하지말고 하루빨리 전면 재수사해 국민의 의혹을 낱낱이 풀어줘야 한다.
김학준<본사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 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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