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단칼’. 과단성 있는 성격으로 매사에 맺고 끊음이 분명해 정치권에서 붙인 애칭이다. 그러나 이런 별명과 달리 중요한 고비에서 장고(長考)가 지나쳐 우유부단함으로 비쳐지기도 한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아무튼 그가 역설하는 정치는 ‘통합의 정치’다. 좌우명도 ‘해불양수(海不讓水·바다는 어떤 물도 거부하지 않는다)’.
실제 오래 전부터 여권 핵심부에서 그를 ‘정계개편 극(劇)’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비장의 카드’로 생각해온 것도 그의 중용적인 이미지와 보수적 색채 및 중부출신이라는 점이 주는 안정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그동안 입법 사법 행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서울지검 형사1부장을 끝으로 법조인 생활을 마감한 뒤 전두환(全斗煥)정권 출범직후인 81년 민정당에 참여,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는 민정당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의장을 섭렵한 뒤 신한국당대표와 한나라당대표를 역임했다. 14대 후반기에는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그러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불과 8표 차로 이인제(李仁濟)후보에 뒤져 결선투표에도 오르지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는 또 원내 3당인 자민련 총재로서 치른 4·13 총선에서는 “‘제2의 왕건’이 되겠다”며 종래의 지론인 ‘중부정권 창출론’을 외쳤으나 자민련의 성적은 참담했다. 그에게 총리직이 ‘왕건의 꿈’을 펴는 자리가 될지 주목된다.
<문철기자>fullmoon@donga.com